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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Oct 12. 2020

Favorite Things

무언가 불안할 때 무언가 초조할 때 무언가 외로울 때 그런 마음이 조금씩 다운되는 날, 나는 어떤 선택을 했다.

래미님이 잠시 글을 쉬고 블로그가 조용했을 때 뭘 하셨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래미님은 당신의 글을 하나, 하나 읽는 중이라고 하셨다. 내가 이 달에 이 시기에는 어땠고, 이 때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과거의 나의 흔적을 차근차근 읽어보는 중이라고 하셨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뒷모습만 봐도 뭉클하지만, 그때의 래미님의 모습은 내가 봤던 모습 중 베스트 3 장면에 꼽는 정말 멋진 장면이었다.

마음이 조금씩 다운되는 날, 그래서 나는 이런 선택을 했다.

나를 다시 읽어보기로.

너무나 다행이다. 나를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건 - 그동안 매일 차곡차곡 쌓아왔던 나의 일기장이, 나의 생각이, 나의 사투가, 그리고 나에게 애정이 있는 분들과의 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글은 심히 부끄러웠고, 어떤 글은 심지어 맞춤법이 너무 틀려 들어가서 수정하기도 했다. 어떤 글은 너무나 풋풋했고, 어떤 글은 열정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당장 날아갈 기세라서 풉 하고 웃기도 하였다. 그러다 발견한 1월의 어떤 글에서 나는 누군가를 또 만났다.

바이올렛님을 처음 본 1월의 어느 날, 나의 후기 속 바이올렛님을 또 만나고 지금은 나의 자매가 된 그때의 먼발치에 있던 바이올렛님이 해주셨던 말이 두둥실 떠올랐다.

좋아하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글, 그림, 책, 숲, 외국어를 좋아한다고, 정작 중요한 꿈지도 보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나열했던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는 바이올렛님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왜 마음이 안 좋을까.

다시 질문을 바꿔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다섯 가지만.

매일매일 생각하기에 안 적을 수가 없는 공부 - 그래, 너는 디폴트지.

그리고 난 정말 실제로 매일 새벽 글 쓰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부담은 언제나 있는 거지만. 그래서 두 번째, 글.

이 두 가지를 적으니, 그다음은 뭘 적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상당히 외골수였나 보다. 진득함은 있지만 새로운 도전은 나에게 너무나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와중에 발견한 이 두 가지에 더 목을 매는 것 같기도 하며 - 

언젠가 신랑과 함께 신년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며 (블로그를 시작하기 한참 전), 그때도 토익 몇 점, 오픽 몇 점, 책 몇 권을 대충 써 놓은 나를 보며, 신랑이 버킷리스트가 뭘 그래, 그건 목표리스트지, 좋아하는 거 하는 리스트는 아니잖아 - 라는 핀잔을 들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나는 늘 이런 생각의 구조를 가졌기에 오히려 '단순하게'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섯 가지를 적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머리를 쥐어짜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이런 걸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랑. 나는 아직도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남편과의 사랑이 너무 소중하고, 아이들과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하물며 잠시 머물다 가는 엄공 방 멤버와도 사랑에 빠져 산다.

그래, 일단 세 개를 채웠고, 그다음은 진짜 - 진짜 - '의미'를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의미를 둘 하니, 자꾸 나에게 이로운 것을 찾으려 하고, 그러다 보니 나의 좋아하는 것 리스트는 이리도 숨이 턱 막히지 않는가.

그래서 네 번째. 영화.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보는 게 너무 좋을 때가 있다. 쉬고 싶을 때 뭘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유튜브에서 공부 클립을 보지 않고, 영화 보여주는 잘생긴 남자라던가 - 그런 사람들의 클립을 정말이지 눈에 빠지게 찾아본다. 자극적인 것도 좋고 잔잔한 것도 좋다. 배우라는 직업과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부시도록 멋있다. 

영화를 적고 나니 뭔가 용기가 생겨 다섯 번째는 그냥 휘갈겨 적었다. 여행.

나는 특히 신랑이랑 같이 떠나는 로드트립을 좋아하는데, 차에서 보는 구름, 차에서 먹는 뻥튀기, 뒤에서 재발되는 아이들, 옆에서 운전하는 신랑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 나 좋아하는 게 많았구나 싶다. 특히 주말에 공부를 안 하는 이유는 이 여행이 가장 크다.

더 적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나는 역사물도 좋아하고, 만화책도 좋아하고, 정크푸드, 특히 치킨을 많이 좋아하고, 성장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정말 역대급이었다) 도 좋아한다. 그리고 동물들도 좋아한다. 아직도 창밖에 소가 풀 뜯는 모습을 보면, 목장에 가서 말의 섹시한 뒤태를 보면 아이들처럼 정말 설렌다. (나도 나름 도시 여자였던가. 특히 시골 동물들이 좋다.) 옛날 추억들을 돌아보면 스노클링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래서인지 운동 중에서는 수영을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책을 보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너무 순진해 보여도 그래도 가끔은 우리 집 집값이 올라갔나 안 올라갔나 부동산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반전?!) 무엇보다 나의 길이 든 오래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에 내 몸을 기대는 것도 너무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나의 마음이 왜 다운되었는지 그새 잊었다. 

마리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favorite things를 불러 준 이유가 있다. 나의 마음은 이리도 갈대 같다. 언젠가 내가 또 이 글을 찾아 읽으며 그래 지금의 나는 이런 게 좋지 - 하는 날도 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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