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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Oct 12. 2020

지구본

언젠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집에 정말 동그란 지구본이 있었는데, 그 지구본은 정말 애매하게 컸다. 

동그란 지구본을 책상 위에 올려놓지 않는 한, 높이가 상당해서 책장이나 옷장 위에 똑바로 올려놓지 못하는 애매하게 크고 둥그런 크기랄까. 학창 시절 항상 내 책상 한편에 자리하다가 결혼 후 아직까지 자리를 잡지 못한 우리의 지구본은 지금 삐딱하게 책장 위에 올려져 있다.

삐딱하게 위치한 지구본의 밑동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테이프로 강력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 속에 지구본의 출처와 마음이 아직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정작 주인인 나는 그 선물의 기억조차 잊은 지 오래였는데, 지구본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는 그곳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네 소원인 방을 만들어 줄 수는 없기에 이렇게 지구본을 사준다. 이거 보면서 나라 나라마다 네 방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나의 작은방 한 켠이 없었던 사춘기 시절, 나는 방이 없어도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만들어 준 아주 넓은 마음속의 방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지구본은 그렇게 나에게 와서, 정말이지 방이 되어주었다.  지구본을 보면서 이 나라도 저 나라도 가고 싶다는 -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갔고, 나는 자유로운 이십 대 때 알바로 돈을 차곡차곡 모아 어디론가 떠나는 경험도 했고, 다시 발이 묶여 버린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세계의 방을 하나씩 하나씩 짓고 있다. 나만의 방법으로. 그 작은 지구본의 나비 짓이 아주 느린 나에게도 이렇게 큰 회오리바람을 서서히 불게 해준 것은 아닐까. 몇 달 전부터 고장 난 프린트를 제발 버리고 다시 지구본을 책상으로 내려줘야겠다.

그 당시 돈 없던 학생이던 우리에게 이런 지구본은 정말 비쌌을 텐데 - 종이 한 장으로 되어있는 그런 지구가 아니라, 어떻게든 실물과 가까운 지구를, 세계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그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에야 그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를 소중하게 대하고, 나의 꿈과 설렘의 모습을 나도 몰랐을 때 옆에서 알아봐 준 그런 친구가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었다는 건 다시없을 인생의 행운이 아닐까.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꼭 그런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나에게 와주었다. 나에게 진심이었던 그런 인연들 덕분에 마음에 사랑과 행복과 감사함은 담는 방법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방이 없다고 놀리는 친구 대신, 방이 없어도 지구본을 사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났고, 엄마, 아빠가 다 일하러 나갔어도 늘 웃으며 반겨주는 할머니가 내 곁에 있었고, 나쁜 남자를 몇 번 만났어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만나지 않았었다. 가족도 우정도 사랑도 모두 다 마음대로 노선대로 가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진심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도, 상대방도.

오늘도 나의 친구 김 씨처럼 나의 작은 진심을 담은 나비를 누군가에게 훨훨 날려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진심이 오늘이야말로 꼭 필요한 그런 사람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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