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호_혜경씨
H를 만났다
십 대 여자아이 한 명을 섭외 중이다. 아이를 통해 알게 된 6학년인데 작년 학예회 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다. 만나면 목소리도 작고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무대를 장악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껴졌다. 무엇보다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기교가 있고 어른을 흉내 내는 춤이 아닌 정말 좋아서 추는 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만남을 미루고 말았다. 나의 고질병이다. mbti를 알고 나선 그런 성향이구나 했지만 외면하고 싶은 성향이다. 알고 나면 더 창피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다. 중요한 일일수록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다. 만나야 할 사람이지만 만나지 않을 핑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제 진짜 해야 할 때가 오면 괴로워한다. 불안해한다. 그러면서 놓지 못하고 놓지 못하니 괴롭고 괴로우니 불안하고 불안하니 놓지 못한다. 무한 반복이다.
결코 완성되지 않는 작품은 졸작에 불과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작품보다 더 졸작일 수는 없다. 완성된 작품은 최소한 탄생이라도 했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찔린다. 그래서 카톡을 보내봤다. (사실 지난주에 보냈었다) 사진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들어본 적 있다고 했고 하고 싶다고 했다. 주말에 만나기로 하고 어머님께 따로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못 만났다.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연락을 해준다고 했다. 미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난 대체 왜 이럴까. 그냥 만나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니. 자책도 했다. 그래도 만나지 못하겠는걸 어쩌겠는가. 내가 나를 기다려줄 수밖에.
금요일이다. 내일은 주말이고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더 미뤘다간 영영 못 만날 것 같았다. 아이의 어머님께 연락을 해봤다.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또 또 불안해진다. 하지만 만남의 순간은 다가올 것이다. 나는 준비해야 한다. 그래 처음에 이렇게 얘기하고 그다음에 이렇게 얘기하고 그리고 저렇게 얘기하면 되지. 질문이 들어오면 질문에 답하면 되는 거야. 만나기로 한 토요일이 되었다.
오전 10시 카페엔 아무도 없었다. 아이 한 명은 발명반 수업을 갔고 아이 한 명은 나와 함께 왔다. 십 대 여자아이를 만날 거니까 넌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래. 아이스티 시켜줄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으라고 하고 아이스티를 시켜주고 만화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라고 했다. 아직 오지 않았다. 라떼를 시켰다. 우유는 조금.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초코라떼와 아아를 시켰다. 얘기를 시작했다.
어머님은 나와는 다르게 –나는 아이들에게 조금 강압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성한다. - 아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려고 해주셨고 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셨다. 감사했다. 아이는 아직 이 상황이 낯선 것 같았다. 초코라떼를 마시며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말과 말 사이에 쉼표가 많았다. 더 만나보고 싶고 더 얘기 나누고 싶었다. 춤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만 롹킹을 배운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나를 또 한 번 반성했다. 나는 아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춤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라고 구시대적 발언을 일삼고 댄스학원에 보내달라는 말을 묵살했다. 반성한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주말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엄마 없이 나와 단둘이.
-피프티피프티 진행과정-
더디다 못해 진행이 안되고 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일단 흑백필름을 샀다. 목과 손을 찍어보려고 한다. 어제 이 프로젝트의 발단이 된 선배님과 통화를 했다.
이 프로젝트는 네가 50살이 돼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진행이 안되는 이유는 아마 네가 50이 아니기 때문일 거야.
아니 내가 말도 안 했는데 진행이 잘 안되는지 어찌 아시고 전화를 하신 거지.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도 하고 50이 되어서도 하고 싶다. 그래서 이번 주는 진행이 안되었지만 다음 주는 될 것이라 믿고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50이 되는 해에 또 한번 해보고 싶다.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50이 되어서 하는 피프티피프티 는 어떤 색일까. 비슷할까. 다를까.
효정 씨가 혜경 씨에게 질문합니다.
1> 만나기로 했는데 미루게 된 지는 몰랐네요. 그런 고민이 있었군요. 초면이고 걱정이 앞서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은 그런 경우 어떻게 극복하나요? 불편한 채로 나가는지 아니면 편해질 때까지 기다리는지 궁금해요.
초면이고 걱정이 앞선다기 보다 제 성향인 거 같아요. 중요한 일일수록 끝까지 미루는 나쁜 버릇이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는 머릿속으로 많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려고 해요. 기다리는 동안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요. 막상 만나면 잘 대처하는 것 같아요. 저의 불안함을 숨기고요.
2> 새로운 아이를 만나게 되어서 저도 같이 기대가 되는데요. 이 친구와는 어떤 질문과 사진을 찍을 생각인지 듣고 싶어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친구라서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지 않을까 해요. 처음 만났을 때 마음속에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잘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하나씩 꺼내보고 싶기도 하고요. 저보다 더 바쁜 스케줄이라 만날 시간은 주말밖에 안될 것 같아서 일단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에 맞는 사진을 찍어보려고 해요. 집 주변에서도 촬영하고 싶고요.
3> 피프티피프티 실험 사진과 영상이 정말 궁금해요. 다른 참여자의 질문 답도 궁금하고요. 남은 인원을 어떻게 채울 생각이세요?
남은 인원은 아직 어떻게 채울지 잘 모르겠어요. 꼭 채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50명을 채우면 어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것도 같아서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어요. 그동안 흑백필름을 사서 이미지들을 찍어보려고 해요. 클로즈업 이미지들이 많을 거 같아요. 영상도 사진을 이용해서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빠르게 진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어요. 필름을 세 롤 샀는데 찍다 보면 답이 또 보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