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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07. 2021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내가 자주 우는 이유

나는 1시간 전에도 아무 생각없이 누워서 예능 프로그램 <여고추리반>을 보다가 울었을만큼 눈물이 잦은 편이다. ‘눈물이 많다’ ‘여리다’는 청소년기, 그리고 이십대 초반에 나를 수식하던 가장 흔한 형용사였다.

어렸을 때 아빠 차를 타고 등교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무언가 늘 “사고”가 터졌을 때였다. 전날 숙제를 하지 않고 자버려서 아침 일찍 학교를 가야한다던가 하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아침부터 울어제꼈고,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아빠가 “빨리 타, 데려다 줄게”하며 나를 학교에 태워준 것이었다. 하루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나를 데려다 앉혀 놓고는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혜림아, 제발, 울지 좀 마라.” 그제서야 나는 무언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닥치면 쉽게 울어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울음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치루는 어떤 의식(?)과도 같았다. 세상의 끊임없는, 그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이닥치는 모든 작용에 대한 나름의 반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나름의 결단이었던 것도 같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 이후에도 수능이 망해서,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서, 친구들과 엇갈려서, 연애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서 나는 자주 울었다. 운다고 무엇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늘 습관처럼 울었다. 그래야만 그 다음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랄까. 나는 한동안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울음에 대해서이다. 참을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참아야 했던 울음. 그 울음은 1년 전 아빠가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빠가 암에 걸렸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아빠의 죽음을 기다려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증오했고, 그만큼 아빠를 사랑했고, 그래서 다시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빠의 병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아빠에게서 자유로워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나를 기쁘게 했다. 내가 죽일 수 없다면, 나는 기다려야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이 당도했고, 나는 아빠의 얼굴을, 아무것도 차려지지 않은 빈소에서, 영정사진으로 마주했다. 우리 사이에 짧고도 긴,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굳이 붙들지 않았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빠의 장례식을 치루려는 친척들과 싸워서 이겨야 했으니까. 우리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장례식 장을 향했다. 고인의 직계비손에게 모든 권한이 떠넘겨지는 나라의 법 덕분에 우리는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담당 실장과 남은 장례의 절차를 이야기했다. 조심스럽게 납골당을 제안하는 실장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딴 거 안합니다.” 가루가 된 이후의 아빠가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나는 굳게 믿고 싶었다.

우리 중 유일한 어른인 언니의 결단(?)으로 애초 계획과는 달리 아빠를 납골당에 안치하게 됐고, 그 덕분에 우리는 강릉에서 평창까지 2시간을 넘게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이동해야 했다. 아빠의 시신이 화장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광판에 화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아빠의 이름이 뜰 때까지 나는 계속 무엇을 생각하려 애썼다. 아빠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이미 남동생은 영안실에서 아빠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한번, 언니는 아빠의 시신이 입관될 때 한번, 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울음을 토해버린 다음이었다. 나는 영안실에도 가지 않았고, 아빠의 입관도 보지 않았다. 나에게 마음놓고 울어버릴 기회는 없었다. 더 큰 이유는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툭 건드리면 터져버리고 말 울음 덩어리를 나는 계속 삼키고 또 삼켰다. 그렇게 쉽게 울어버리면서 살았던 내가, 정작 가장 슬퍼해야 하는 아빠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기 위해 발가락까지 힘을 주면서 애를 쓰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울음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무사히 납골당에 안치해놓고 엄마 집으로 돌아왔다. 깊은 피로가 몰려왔다. 엄마에게 이불을 펴달라고 하고, 나는 방의 한 구석에서 오랫동안 잠을 잤다. 장례식을 치루지 않아서 내게 남겨진 휴일은 길었다. 긴 잠에서 깬 나는 춘천의 집 대신에 바닷가로 갔다. 어두워진 호텔 방안에서 깊고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깨달았다. 이 눈물이 아빠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눈물이었다는 것을. 아빠를 오랜 시간 증오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져야 했던 미움 사이 사이에, 사실은 아빠를 그리워했고, 사랑하고 싶었고, 좋았던 시간들을 마음껏 추억하고 싶었던 마음들이 더 간절히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애써 외면해야 했던 그 마음들에 대해 뒤늦게 애도해야 했다. 가장 울고 싶지 않았던 순간에 사실은 가장 크게 울고 싶었던 나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깨달았다. 어느 소설의 문장처럼 인생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라고.

이제는 더 이상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들에 화를 내며 울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아닌 무엇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내 안에서 온전히 통과시키면서 많이 울 것이다. 이 모순적이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여기에서 우는 것뿐이지만, 그렇게 운다고 해서 쉽게 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대로 살기 위해 애를 쓸 것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나는 울겠지. 이 헤픈 울음이 지겨워 질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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