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자락에서 답장을 읽은 것 같은데 어느새 완연한 봄이네요. 꽃이 가득한 사계절의 시작점을 윤슬님은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미세먼지를 차치하면 여기저기 구경할 게 많은 날씨라 저는 요즘 틈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고 있어요.
아, 그렇다고 놀러만 다니느라 분주했던 건 아니고요, 3월부터 시작한 출판 디자인 수업에 적응하느라 좀 정신이 없었어요. 훈련생이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정말이지 누군가 민들레 홀씨를 ‘후’하고 분 것처럼 3, 4월이 날아간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답장이 늦고 말았네요. 민망하지만, 달력의 숫자가 또 달라지기 전에 늦게나마 이렇게 회신을 해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슬님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다가 문득 이런 상상이 들었어요. 기분 좋게 수영을 하고 약간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가뿐하게 집에 오는 윤슬님의 뒷모습 말이에요. 청춘영화에서 볼 법한 이 건전한 장면을 저는 약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다에 비치는 잔물결(윤슬)을 사랑해서 자주 여행 가던 한 사람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안에 ‘완전히 빠져들기 위해’ 수영을 배우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과잉된 해석일까요?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영이란 취미가 윤슬님과 참 잘 어울린다는 거예요 :)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이런 예감이 들기도 해요. 날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제주 바다 윤슬 위에서 수영했던 여행 이야기를 제가 편지로 전해받지 않을까 하는 예감.
거기에는 바닷물 속의 고요가 수영장과 어떻게 다른지, 또 바닷속에선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는지 적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혼자 막 그런 상상을 하며 편지를 읽어서 그런지 첨부된 윤슬 사진을 이번엔 꽤 오래 지켜보았던 것 같아요.
저에게 물었죠. 요즘 하루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물속에서도, 일상에서도 중심 잡는 법을 익히고 있는 윤슬님과 다르게 요즘 저는 중심보다는 가장자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코앞에 해야 하는 것들이긴 해요. 이를테면 디자인 수업 과제라던가 관련 자격증 같은 것들이 일상의 한가운데에 자리해 있죠. 여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게 제 삶의 무게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것들보다 점심시간에 잠깐 산책할 때 보는 풍경에 더 마음을 쏟곤 해요.
계절이 예뻐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인지는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요즘 식물 앞에만 가면 너무 야단스러워지고 있어요. ‘예쁘다’에서 멈추지 않고 우뚝 서서 연속으로 사진을 찍거나 일부러 식물이 많은 곳에 찾아가고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요즘 제 폰 사진첩에는 셀카는 사라진 지 오래고 거의 이 세 가지만 담겨 있답니다. ‘꽃과 책과 밥’ ㅎㅎㅎ
꽃은 예뻐서 찍고, 책은 기억하고 싶어서 찍고, 밥은 (나름 건강하게 차려 먹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찍는 건데... 쓰고 보니 민망하네요. 저.....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죠....?
저도 그걸 알고 있는데 제 관심사를 애써 부정하긴 싫어 요즘은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내 시야에 눈에 띄는 건 중심보다 주변에 있나 보다.‘하고 말이에요. (일종의 ’ 자기 수용‘을 연습 중인데 아직은 어설픈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일상이 똑같아서 재미없다는 지인에게 윤슬님이 야무진 반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박하더라도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분명히 알고, 그걸 계속해서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함이 깃들지 않는 법인데 슬님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수용'에 능숙한 사람이 아닐까요? 흔들리거나 따분할 때마다 자신의 취향의 맞춰 새로운 경험을 선물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여행, 헬스, 글쓰기, 독서 그리고 수영까지!)
혹시라도 앞으로 위태로운 순간과 마주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단히 변화하려 애썼는지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
윤슬님. 편지 말미에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물었었죠. 이 질문의 무게가 새삼 무거워 지난날들을 조금 진지하게 되돌아보았는데요. 아무래도 요즘 저를 웃게 하는 건 '맑은 날의 산책'이 아닐까 싶어요. 학원 근처에 청계천이 있어 점심을 먹고 정해진 시간 동안 꼭 걷곤 하는데 그 단순한 동작이 제게 큰 위안이 되었거든요. 따뜻한 날, 얼굴을 천천히 데우는 볕을 쬐며 개천 주변을 걸을 때면 언제나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불시에 찾아오는 불안이나 막막함을 잊게 하는 건 바로 그런 거더군요. 트여있는 공간에서 천천히 느슨해지는 감각 말이에요.
나 자신에게만 파고들어 좁아진 시야는 어떻게든 외부로, 주변으로 돌려야 한다는 걸 매일 걸으며 깨닫고 있어요.
내일이면 이제 새로운 한 주가 다시 시작이네요. 날은 좋아도 미세먼지는 늘 변덕스러우니, 마스크 꼭 챙기길 바라고요, 다음 주는 예쁜 계절을 더 오래, 더 여유 있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많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그리고 저도 궁금해요. 윤슬님을 웃게 하는 최근 즐거움은 무엇인지.
답장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