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다육이가 부러웠다

조용히 사랑받는 식물이 부러울 때

by 슥슥


1.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진 3일간의 달콤했던 연휴가 끝이 났다. 지금은 일요일 밤 10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기에 천천히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모바일로 3일간의 실적을 확인해보고, 다이어리를 펼쳐 지난주 적어 둔 업무 내용도 훑었다. 양치를 하다가 떠오른 회의 일정도 캘린더에 마저 적어두었다. 그러면서 이 자연스러운 동작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빨리 새 업무에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한 달 전 일방적인 보직 변경 통보를 받았다. 처음 겪는 인사이동도 아닌데 이번 건 꽤 타격이 컸다. 당시 MD란 직책으로 5년을 이어온 상태였다. 업무가 제법 손에 익으니 속도도 붙었고, 다른 부서보다 사람과의 부침이 적어 개인적인 만족감도 큰 편이었다. 업무를 마친 후에는 온전히 취미생활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팀 이동 발령이 떨어진 것이다. 일상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3.

조직개편 공고가 발표된 후 불과 4일 만에 새 부서로 이동했다. 새로운 층수의 공기를 감지하기도 전에 내 눈앞에는 낯선 풍경들이 쏟아졌다. 흐름을 알 수 없는 업무들과 많은 사람과의 대면 회의, 자기 업무 하느라 정신없는 팀원들까지. 모든 게 어색했다. 미소로 아무리 가리려 해도 내 얼굴은 종종 하얘지거나 혹은 자주 빨개졌다. 그래도 영업직을 하며 낯가림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의 인간관계 폴더가 통째로 사라진 듯 가벼운 인사말 조차 건네기 어려웠다. 그렇게 서먹한 시간들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점점 허기가 졌다. 익숙한 풍경과 익숙한 얼굴이 그리웠다. 독립을 했음에도 7월에 유독 본가로 자주 향했던 건 아무래도 그 이유가 컸다.





4.

그날도 그랬다. 사소한 업무 실수를 했을 뿐인데 자책이 비대해지던 날이었다. 별 탈 없이 지내던 내게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을까 원망도 들러붙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침울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자 뭐에 홀린 듯 본가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나오니 오래 거닐던 골목과 촘촘히 줄 세운 빨간 벽돌집들이 보였다. 그게 뭐라고 눈에 익은 게 보이자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틀어 놓은 TV 소음, 고소하게 풍기는 밥 냄새, 막 치워서 반들반들한 거실 바닥, 창문에 줄지어 있는 작은 화분들까지. 불과 1년 전 매일 마주한 장면이었는데도 새로운 온기가 느껴졌다.






5.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거실에 있는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향하는 엄마가 보였다. 보통 엄마가 옥상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금지옥엽 키운 다육이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텃밭에 있는 고추나 방울토마토를 따기 위해서였다. 작은 그릇을 가져가는 걸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후자인 듯했다.

바람도 쐴 겸 고민 없이 나도 엄마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옥상의 정원은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가득했다. 통통한 잎을 자랑하는 다육이들은 어느새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블루베리나 토마토도 톡 따기 좋은 크기로 열매가 맺어 있었다. 문제라면 우울하고 답답한 속마음을 감춘 나 하나였다.


예쁘게 꽃 피운 다육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식물은 좋겠다. 그저 주는 사랑받으며 자라기만 하면 되니까.”그러자 엄마가 한 식물의 잎을 매만지며 말했다.



식물도 잘 자라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데.
얘네들도 분갈이를 하면 며칠을 앓아.
좋은 화분에 넣는다고 쑥쑥 자라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시들시들해.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잎도 단단해지고 색도 더 청량하게 예뻐지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원망과 미움을 품고 새로운 화분을 떠나려고 매일 다짐만 하던 내가. 어쩌면 더 나은 양분과 햇빛을 받고 있는 건데도 자라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내 앞에 손바닥만 한 다육이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새 부서에 온 지 두 달째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펼쳐놓은 회사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으며 생각해본다. 출근은 여전히 반갑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새 화분에 터를 잡아가고 있다고.


(내일도 존버 해보자)



plant-2004483_1920.jpg Image by Scott Webb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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