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 있는 작은 창문 쪽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말했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엄마는 내가 보던 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대답했다. “그럴까?"
밖은 완전한 회색이었다. 빠르고 촘촘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모여 탁한 잿빛을 완성한 상태였다. 나는 여태 자연이 만들어낸 거친 색은 응시하려 했지,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비 올 때 나가려는 수고는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었단 이야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은 산에 가는 날이었다.
평소라면 비 올 때 어딜 나가냐며 쿨하게 포기해 버렸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나의 두 다리는 나가라고 아우성이었고 가기로 한 봉화산은 차 소음이 심한 중랑천 대신 가보기로 점찍어둔 곳이기도 했다.
결국, 숙고 끝에 생애 처음 빗속 산행을 강행한다. 어차피 목적은 정상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둘레길을 산책하는 것이니 괜찮겠지, 낙관하면서. 혹시나 빗줄기가 더 굵어지게 된다고 해도 되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생각보다 더 사나웠다. 장우산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음에도 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센 비바람과 걸으면서 튀는 빗물 때문에 온몸이 조금씩 축축해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 초입에 도착하니 바지는 이미 무릎까지 젖어있었고, 얼굴과 등은 정상에 막 도착한 사람처럼 땀으로 흥건했다.
괜히 올라온 건가 후회의 말들이 안에서 슬슬 똬리를 틀어가던 때, 마침 작게 마련된 쉼터를 발견해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불시에 얻은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엄마와 나는 말이 없었다. 체력 약한 모녀는 반응하지 않을 때 충전이 되니 그럴 수밖에. 다행히 둘 사이의 낀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이 커다란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뭐랄까, 꼭 마이크의 하울링 같았다. 바람이 나무를 지나가면 음향이 증폭되어 출력되는 것처럼 쏴아ㅡ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정말이지 요란했다. 누군가 유튜브에서 숲 소리 ASMR을 아주 크게 틀어놓은 것처럼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힘차게 나풀대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누리고 싶은 소음이었다.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주파수가 아니라 오히려 한없이 풀어져서 나 자신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누군가 산이 왜 좋냐고 물어보면 ‘평화롭고 조용하잖아’라고 대답하곤 했지만,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저 때이다. 그 어느 순간보다 떠들썩했던 비 오는 날의 산행. 수분을 충분히 머금어 더욱 울창했던 산림이라던가 그 아래에 핀 커다랗고 독특한 색의 버섯들도 기억에 남지만 산 초입 부근에서 마주한 나무들의 라이브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