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수업의 첫날. 모든 교과 과정이 시작되는 3월 2일이라 마치 새 학기가 시작되어 등교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기대와 설렘이 밀려와야 할 순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내 심리상태는 이와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선 끝없는 설전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결같이 하고 싶은 건 읽고 쓰는 일뿐인데, 완전히 다른 분야의 기술을 이제 와서 배우는 게 맞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용기 내어 나만의 시간을 얻었으니 잘하고 싶은 걸 더 파고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으려면 기약 없는 기다림과 고충을 견디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에게 그런 깜냥이 있는가 자문해 보면 솔직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학원 개강 전 겨우 세 달의 휴식기에도 바들바들 떨었던 사람이 나이지 않은가. 게다가 여태껏 일기에 가까운 글만 써왔으니, 당장 어떤 매체에 기고할 실력을 갖춘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쓰기 역량은 장기적으로 키우되 그것만 바라볼 수는 없다고 판단해 디자인 학원으로 향했건만, 또다시 코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셈이었다.
출발점에서조차 이토록 혼란스러운 이유는 어쩌면 앞으로 쏟아야 할 시간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수강한 출판 편집 디자인 수업은 90일 과정이었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8시간, 그러니까 앞으로 꼬박 720시간을, 지금 향하고 있는 종로의 학원에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그 시간을 무사히 보낸다 해도 이후 나의 배움이 생계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 속에서도, 나에게 디자인 안목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작은 단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대학 시절 PPT만큼은 늘 자원해서 작성했던 기억이나, 회사에서 실적 발표를 한 날 대표님이 유독 파워포인트 디자인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던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비록 애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어도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앞장서서 작은 기술을 발휘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어쩐지 발끝에 맺힌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과거의 조각들을 되새기며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던 걸까. 신기하게도 학원에 도착한 나는, 강의 내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맨 앞자리에 착석하게 된다. 그 와중에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돌이켜보면 그 행동이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그저 딱 하루만 책임지자'며 자신을 타이르는 습관이 생긴 게.
큰 꿈을 이루려면 멀리 내다봐야 한다지만, 광활한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던 나에게는 그 격언을 적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먼 곳을 내다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실용성 좋은 기술을 배운다 해도,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생각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멀리 보지 말고 일단, 바로 앞에 놓인 하루 일과만 책임져보자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목적지를 보지 않고 일단 항해부터 할 수 있었던 건 학원의 커리큘럼 덕분이기도 했다. 수업의 최종 목표가 취업을 위한 디자인 포트폴리오 완성이었기 때문에, 진도만 잘 따라간다면 디자이너로서 재취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결국, 그 무렵 슬며시 떠올린 차선책은 이것이었다. 30대 중반의 신입 디자이너. 물론 이 대안은 성공할 확률이 현저히 낮은 데다 설령 취업이 된다고 하더라도 주니어로서 낮은 처우를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 하나는 붙들고 있었다. 모든 조건이 불만족스러워도 공동 작업이 아닌 독립적인 업무 환경만큼은 확보할 수 있을 거란 희망 말이다. MD로 근무할 당시, 방송 화면 비주얼을 담당하던 디자이너들이 작업에 홀로 몰두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업무적 소통은 불가피하겠지만, 디자인의 결과물은 끝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질 거라는 믿음이 마음 밑바닥에 계속 고여 있었던 것이다.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추진력을 불어넣어 줄 거라는 생각 또한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디자이너 취업을 보험증서처럼 손에 쥐고 매일 종로를 오갔다. 3개월이란 시간 동안 내게 주어진 미션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포트폴리오에 들어갈 7가지 디자인 작업물을 완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그래픽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것. 얼핏 보면 간단했지만, 불안에 취약한 I형 인간은 강사로부터 이 과제를 전해 들은 순간부터 걱정이 산처럼 부풀고 만다. 그리고 이 우려는 금세 현실이 되었다. 머리를 싸매고 포스터 하나를 겨우 완성하면 곧바로 카드뉴스 디자인 구상을 하고, 이를 마무리하면 또 다른 디자인 작업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격증 필기시험 준비는 틈틈이 스스로 해야 하다 보니 집에 돌아와서도 기출문제 몇 개는 풀고 자야 했다.
하루의 시간을 배움에 쏟은 덕에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은 차츰 나아졌다. 속도가 빠르진 않아도 포트폴리오로 채울만한 디자인도 조금씩 늘어갔다. 문제가 있다면 딱 한 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것.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