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연휴가 끝나도 흐뭇한 이유
굼뜬 내가 움직였다.
1.
책장에 등을 기댄 채,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드디어 실감이 난다. 달콤한 연휴가 끝이 났다는 것을.
보통 이런 명절 막바지 날엔 타임리프 초능력을 써서 연휴 첫 날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지금의 심정은 웬일인지 평온에 가깝다. 아무래도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연휴 동안 하고자 했던 일들을 얼추 끝 맞췄기 때문일 것이다.
자산관리양식 업데이트
매일 카카오뷰 보드 발행
내일배움카드제로 주말 수업 등록
1월 가계부 포스팅
읽다만 책 완독 후 서평 쓰기
티스토리 블로그 포스팅
그리고 지금의 브런치 쓰기까지
이번 휴가 때 마친 것들이다. (사실 들여다보면 별 건 아니지만) 저 나열만 보면 왠지 계획적이라는 오해를 사기 딱 좋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나태 지옥행(영화'신과 함께' 참고)이 결정된다고 해도 딱히 항변할 수 없는 게으른 인간이다. 금요일 저녁쯤 주말에 할 일을 잔뜩 세우고 토요일 오후까지 늦잠을 자다 계획의 절반 정도도 마치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연휴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한 보따리의 플랜을 세우고 금세 안일해져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연휴를 보낸다는 건 미뤄왔던 것들을 모두 수행하고 싶은 과욕과 그것들을 지키지 못해 나에게 실망하는 자책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욕심만 많고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이번 연휴의 달성도는 나에게 의미가 꽤 컸다. 게을렀던 지날 날과 다르게 이번 연휴엔 무엇이 날 움직였던 걸까?
2.
일단 이번 명절은 평소와 다르게 '시간 부자'였다. 오랜 항의 끝에 제사를 지내던 관행을 없애고 납골당 방문으로 형식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제사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과정이 생략된 것뿐인데도 몸과 마음이 여유로웠다. 진하게 풍기던 기름 냄새와 명절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사라지자 조용히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뒤로 미룬 것들을 하나둘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일어나자마자 지난주 못 읽은 뉴스레터부터 챙겨 읽었다. 그리고 도중에 멈춘 심리학 책도 다시 펼쳐 들었다. 납골당을 향하는 차 안에서는 카카오뷰 품앗이를 하거나 버즈를 귀에 꽂고 오디오북을 재생시켰다. 밤에는 '퍼블리'라는 콘텐츠 플랫폼에서 흥미 가는 기사 위주로 가볍게 훑었다.
눈알만 요리조리 굴리는 이 행위는 신기하게도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굼뜨고 둔한 나의 의욕을 툭툭 건드려 깨웠으니까. 정말 그랬다. 어피티 뉴스레터나 퍼블리에서 재테크 칼럼을 읽다 보면 미뤄둔 가계부 포스팅을 써야겠다 마음먹게 되었고 밀리로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서평에 쓸 내용들을 끄적거리곤 했다.
조금 우스운 표현이지만 문득 내가 읽는 텍스트들이 '듣기 좋은 잔소리'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꾸지람 없이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3.
무엇이든 가볍게 읽고 필요한 일을 하리라 다짐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취향대로 휴식을 즐기는 시간, 그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의지를 발휘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설 특집 예능 프로를 보는 부모님의 웃음소리와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는 동생의 즐거운 얼굴을 무시한 채 단호히 책상에 앉는 내 모습을 상상했건만 현실은 자꾸 이불 속이었다. 노트북과 각종 기기들까지 바리바리 싸왔는데, 따뜻하게 몸을 데우는 이불속에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이번 주말에 몰아서 할까.
명절엔 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다들 쉬는데 나도 쉬고 싶다
여러 콘텐츠들을 읽으며 호기롭게 계획을 세우던 나는 사라지고 게으름의 그림자가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미뤄둔 할 일을 주말에 꾸역꾸역 하다 포기했던 의지박약의 나. 지금 이불속에서 나오지 못하면 다시금 그 모습과 마주해야 할 게 뻔했다.
탱자탱자 쉬면서 오늘 당장 행복할 것인가
설렁설렁 한 두 개만이라도 해볼 것인가
'탱자탱자'와 '설렁설렁'의 싸움.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탱자'를 고르면 오늘이 즐거울 테고, '설렁'을 택하면 후회가 적을 터였다. 두 의태어를 두고 저울질을 계속하다 불현듯 '설렁설렁의 손'을 잡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적 갈등이 시작된 후로 쉬고 있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휴 마지막 날, 아무것도 하지 않아 후회하고 있는 나와 더 이상 대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4.
그렇게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끝낼 수 있는 일. 설렁설렁 가벼운 마음으로 첫 발을 떼었을 뿐인데 하다 보니 속도가 붙었다. 잘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은 옅어도 작은 일들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나름 수월하게 다음 할 일들이 보였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연휴의 마지막 날.
브런치 글쓰기로 지난 5일을 회고하고 있는 지금, 다행히 자책의 감정보다 흐뭇한 기분이 먼저 든다. 사실 당장 달라질 건 없다. 내일도 난 똑같은 직장으로 출근해야 하고, 똑같은 자리에 앉아 늘 했던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그런데도 힘이 난다. 느리게나마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날들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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