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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Jan 04. 2023

멈춤을 선택함으로써 견뎌야 할 진짜 무게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자고 말았다. 어제 서점 일이 확실히 고단했나 보다. 6시 기상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씁쓸했지만 그 감정과는 별개로 몸의 컨디션은 좋았다.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졌다는 감각이 분명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게을러지고만 싶다'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건강보험공단 방문 일정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목소리에 분명 잠식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몇 번 뒹굴뒹굴하다 느긋하게 옷을 입고 밖을 향했다. 마스크로 입을 가렸음에도 찬 공기는 금세 폐에 들어찼다. 목적지까진 도보로 30분 거리. 막상 나오고 나니 내가 이런 산책을 좋아했음을 실감했다. 가야 할 곳이 마침 걷기에 딱 좋은 간격이라 고민 없이 걷는 산책. 목적지가 분명해서 고민이 없는 산책 말이다. 조금 상쾌해진 마음으로 요즘 꽂혀있는 정바스의 음악을 들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 공단에서의 할 일은 '임의 계속 가입'을 신청하는 거였다. 퇴사를 한 후에도 약 3년간 직장인 가입자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였다. 사실 이 신청의 목적은 나보단 부모님을 위해서였다. 내가 건강보험료 상의 직장인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피부양자인 부모님은 보험료 납부할 필요가 없었던 혜택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단 직원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지역 가입자로서 내야 할 나의 보험료와 부모님 건강보험료를 합한 금액보다 직장인 가입자를 유지했을 때의 금액이 더 비싸다는 것. 다시 말해, 보험료 절감을 위해선 임의 계속 가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고민이 들었다. 총액을 따졌을 때엔 지역 보험 가입자로 유지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만 나의 퇴사 결정에 도리어 부모님은 지불할 관리비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맞닥뜨리기 싫은 순간이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 말이다.





고민 끝에 임의 계속 가입은 신청하지 않았다. 지역 가입자 신분을 유지하되, 부모님의 보험료를 일부 지원하자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공단을 나오며 통화한 엄마는 '괜찮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내 마음이 편하고자 하는 고집이기도 했다. 다시 집으로 향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내가 '멈춤'을 선택함으로써 견뎌야 할 진짜 무게인가 하는 생각 말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 이따위 것보다 오히려 이런 것... 내가 얻은 자유로 인해 가까운 사람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엄마의 '괜찮아'란 말을 쓰리게 듣는 것, 본가 방문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지는 것, 그럼에도 싫은 일에는 도저히 손이 뻗치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 







나를 소진시킨 일로 인해 취할 수 있었던 안정이 분명 있었다. 그중엔 '자식 노릇'이란 것도 있었다. 본가에 생활비를 보태고 직원가로 부모님의 생필품을 사는 것, 그리고 생신 선물이라면 어느 정도의 부담은 흔쾌히 받아들인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많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모아놓은 돈 덕에 이들을 나의 경비에서 제외시킬 생각도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줄어드는 계좌 앞에서 옹졸해지지 않을 자신은 없으니까. 





조금은 앞이 캄캄해지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정오의 햇빛이 몹시 따사로웠다. 어느 지점에선 갑자기 쏟아진 햇빛 때문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찰나의 감각이 기억에 남는다. 볕이 너무 강렬해서 눈꺼풀을 닫았는데도 앞이 환하다고 느껴지던 그 순간. 어쩐지 앞으로 내게 꼭 필요한 밝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눈을 뜨고 있는데도 캄캄하다고 여겨질 때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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