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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Jan 22. 2023

사진을 보다가

(바이브랑 관련 없음)



1.

설날. 예쁜 그릇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떡만둣국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몇 차례의 조율 끝에 내 차지가 된 금(빛) 수저로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속이 뜨끈해졌다. 식탁 위에 오가던 대화들, 감탄들, 웃음들 덕분에 얼굴도 금세 데워졌다. 발그스레 볼이 붉어진 줄도 모른 채 집중했던 오늘 아침은 어쩐지 꼭 남기고 싶었다. 매년 비슷한 시각, 똑같이 먹는 음식이지만 새삼 그게 너무 감사해서.








2.

드디어 한라봉 수확을 했다. 옥상 텃밭에서 1년 동안 엄마의 보살핌을 받은 결실이었다. 작은 화분 하나에서 무려 7개의 한라봉이 열렸다. 혹여나 열매가 떨어질까, 가지가 부러질까 서둘러 지지대를 동여 맨 엄마의 정성을 이 아이도 알아본 것일까. 뭐 하나 상처 입지 않고 처음 열매 맺은 대로 잘 자라주었다.



딱 하나 아쉬운 건 풍성하게 열린 기쁨을 기록해 두기도 전에 서둘러 가족들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나 또한 껍질을 까다가 뒤늦게 아차 싶어 사진을 찍어뒀다. 그러고 보면 새삼 놀랍다. 손가락 두 개로 꼭지를 똑 떼내어 훌렁훌렁 까먹을 수 있는 이 과일이 무려 네 개의 계절을 거쳤단 사실이.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부터 벌레 많은 여름과 겨울 추위까지 견뎌낸 이 자그마한 열매를, 아니 이 대견한 시간을 나는 그동안 호로록 먹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엄마의 돌봄을 옆에서 그저 지켜보았을 뿐인데도 한 식물의 초연한 성장을 상상하다 불쑥 아득해지는 건 아무래도 그 때문이다. 어쩐지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호로록 먹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먹을 거 앞에선 양심보다 호기심의 힘이 더 거셌다.1년의 결실을 와구와구 먹으며 생각했다. 엄마표 셀프 재배 한라봉의 맛을 한 단어로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음....뜬금없지만 '두 배'라는 말이 떠올랐다. 달콤함도 새콤함도 정말이지 딱 '두 배'였기 때문에.

"너무 신데, 그러면서 동시에 매우 달았다. "









3.

비관의 늪에서 일주일 만에 몸을 추슬렀다. 위클리 플래너에 투 두 리스트를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무기력에 절여있던 몸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어떤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머물러 있을 것만 같던 감정이 옅어졌다. 나를 옭아맸던 기분이 허무할 정도로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다시 찾은 평온에 안도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간절히 대비하고 싶어진다. 다시 그 어두운 터널 속에 빠져있을 때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란 내적 외침을 이길 만한 강력한 요소가 과연 있을까.



나는 여태 그게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이 사라지기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 내몸을 통과하면 자연스레 회복은 될지언정 텅 비어버린 기록과 그로 인한 자책이 한없이 비대해져서다.


지금껏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의욕을 북돋을 수 있는 문장을 읽고 또 읽는 것이었는데...우울의 기미가 보일 땐 무조건 서점으로 달려가 볼까. 아니면 읽지 않은 자기 계발서라도 재빨리 구매해 볼까.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 중이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강제적으로라도 나를 다른 환경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장소와 물건 앞에 나를 놓아두기. 이 점을 잊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쓰기의 세계에서 오래 버티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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