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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Jan 29. 2023

낄낄대다 불쑥 정신이 차려졌다





<가녀장의 시대>를 읽으며 낄낄대다 불쑥 정신이 차려졌다. 삼십 대의 나이에 글 하나로 가세를 일으켜 어엿한 가(녀)장이 된 주인공 슬아를 보며 고작 웃음소리만 내뿜고 있는 나 자신이 사뭇 못나 보여서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했나. 조금 후한 시선으로 돌아본다면 그나마 오후까지는 양호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이어리에 적어둔 대로 어제 읽다 만 책을 마저 읽었고, 서평도 남겼으며, 집밥으로 끼니도 잘 챙겨먹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로 급격한 피로와 추위가 찾아왔다. 여태 겨우 동공 정도만 좌우로 움직였을 내 두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침침함을 호소하고 있었고, 전달보다 5배 높아진 가스비에 당황한 내 몸은 온돌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쉬어볼까'

흐릿한 시야로 싸늘한 공기와 싸우는 자신에게 잠시 휴식을 허용한 게 실수였다. 침대에 올라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이자마자 나는 다시 그 안락한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폰을 뒤적거리며 흘려버린 4시간. 이렇게 누워 보낼 땐 내 얼굴이 김태희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좋아질 수는 없을 것 같다. 해야 할 일과 자책이 내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는데도 징하게 누워 있는 인간이니 말이다. 나의 몸뚱이를 일으킨 건 오늘도 '허기'였다. 딱히 밥심이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나의 몸은 뻔뻔하게 배를 채우려 했다.






어제 사 둔 떡 조각과 귤, 유일하게 남은 맥주와 꼬깔콘을 밥처럼 먹었다. 그러면서 고민했다. 오늘 쓰기로 한 글을 쓸까, 아니면 책을 마저 읽을까. 실은 이제는 써야 할 차례였다. 독서가 쓰기에 필요한 학습인 건 분명하지만, 문자를 머릿속에 입력하는 것만으로 쓰기의 수준이 나아질 리 없었다. 읽기와 쓰기를 고민하는 시점에 정답은 언제나 쓰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맥주로 조금 더 어리석어진 나는 또 오답을 택하고 말았다.






그렇게 펼쳐든 게 <가녀장의 시대>였다. 저녁 8시가 되어 에세이 쓰기를 할 자신이 없어 도망간 책.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로 대차게 성공한 삼십 대 여성이며, 내용의 대부분이 그녀의 '쓰기 생활'을 다루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글쓰기 도피 수단으로 독서를 하면서도 '쓰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셈이었다. 더구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슬아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지 설명할 때는 왜인지 더 숨을 곳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휴일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줄담배를 피우면서도 끝내 하루치의 글쓰기를 마감하는 현실 작가의 삶을 읽다 보면 절로 부끄러워졌다. 성공한 인기 작가와 그 무엇도 아닌 백수란 신분 간극을 생각하면 사실 비교할 명분도, 이유도 없지만 그런데도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충분해 보이는 작가도 이렇게나 맹렬히 쓰는구나' 당연한 이 사실을 페이지마다 깨달았으니까.






갈수록 머쓱한 얼굴이 되어 단숨에 140페이지를 읽었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고 가독성이 정말 좋았다. 저자가 고심해 고른 단어와 애쓰며 빚은 문장 덕분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읽기를 과감히 멈췄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설거지해야 할 식기들이 있었고, 닦아내야 할 얼굴과 치아가 있었으며, 써야만 하는 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남은 할 일을 마무리하려면 빠듯했다. 뒤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했지만 꾹 참고 책장을 덮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마지막 일과인 일기를 마쳤다. 오늘은 자면서 흘려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 유념하고 싶은 한 인물에 대해 곰곰 생각할 것이다.


쓰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 자기 몸을 엄격히 다루는 어린 작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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