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토끼 Oct 24. 2020

어른의 어휘력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 힘과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어른'다운 어휘력이다.

방송 작가 출신의 유선경 작가는 어휘력이 왜 중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어휘력을 기를 수 있는지 책에 담았다. 무심코 썼던 단어의 세세한 용법과 '이런 말도 있었어?' 싶은 재미난 단어의 향연에 작가의 세상을 보는 시선과 철학이 곳곳에서 드러나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잘 된 책인지는 모르겠다.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니 '그래서 메시지가 뭐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 bookhopping 하며 이 책 저 책 동시에 읽느라 그런 걸지도..)


그래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고 몰랐던 단어를 알아가는 기쁨이 컸다.


학창시절에 선생님이 칠판에 분필로 수업내용을 쓰시다 잘못 스치기라도 하면 못으로 철판 긁는 때처럼 신경을 굉장히 자극하는 마찰음이 났다. 이런 따위의 소리를 '자그럽다'라고 한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가면 뭐 하나 꺼낼 때마다 가방 안을 온통 헤집느라 정신까지 쏙 빠진다.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어휘는 '걸터듬다'이다. '무엇을 찾으려고 이것저것을 되는 대로 마구 더듬다'라는 뜻이다. 


통번역을 전공하다보니 한국어로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걸 영어로는 길게 풀어써야 하는 경우, 또 반대로 영어로 흔히 쓰는 단어인데 한국어로는 정확히 들어맞는 단어가 없어 어감이 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자그럽다', '걸터듬다' 같이 그 상황에 꼭 맞는 어휘를 쓸 때의 희열은 통번역사라면 누구나 알 거다.

맞춤한 낱말을 구사하면 불필요한 곁가지 서술을 줄여 효율적일 뿐 아니라 그 낱말을 디딤돌 삼아 하려는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자유자재로 발전시킬 수 있다. 


틀린 맞춤법, 뜻과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흐리멍덩한 문장으로 쓴 문자 메시지는 성질 돋우는 데 아주 그만이다. 그것들은 과격하게 말해 글자 쓰레기다. (...) 예전에 작가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은 적 있다. "맞춤법 틀리는 남자랑 연애할 수 있어?"

뭔가 동지를 만난 것 같았다. 통역사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부부동반 모임을 가면 남편들끼리 "그쪽도 부인이 부부싸움할 때 주어 목적어 따지나요?" 하소연하며 금방 친해진다고. 직업병 같은 거지만 거슬리는 건 분명하다.


처음 들어보는 재미난 단어들도 끝없이 나온다.

맘눈(마음눈):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능력.

참눈: 사물을 올바로 볼 줄 아는 눈.


안다니: 무엇이든지 잘 아는 체하는 사람.

안달뱅이: 걸핏하면 안달하는 사람.

트레바리: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함. 또는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


그리고 세상에,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니! '새물내'다. 옛날에는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을 특별히 '새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파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어휘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단어를 외울 필요는 없지만 관심을 갖고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더 넓은 세상을 정확하게 보게 될 거다.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을 안다고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사물과 현상은 맞춤한 이름을 알면 거의 아는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아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부의 추월차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