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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Oct 25. 2020

출판하는 마음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 거대한 시스템에 하나의 부속으로 끼워져 파편화된 노동을 수행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기 '맡은 바' 책임을 다할수록 '총체적' 삶에는 무능해지고 만다. 

매일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비행기를 탈 때 책이 없으면 불안하고, 10일짜리 위빠사나 명상코스가 묵언수행이라는 것보다 책과 필기류 반입금지라는 게 더 무서웠던 나지만 정작 그렇게 좋아하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글을 쓰는 재미를 느끼고 독립서점과 독립출판에 관심이 생기고 나서야 호기심이 생겨났다. 


『출판하는 마음』은 글을 쓰고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편집, 디자인, 마케팅과 판매에 이르는 전 단계를 10명의 인터뷰에 담았다. 저자, 편집자, 번역자, 북디자이너, 제작자, 마케터, 서점 MD, 서점인, 출판사 대표까지, 책을 만들 때 거쳐가는 손을 모두 그렸다.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이 이 사람들의 땀과 뜬눈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것. 


저자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다. 저자가 최초로 위로받는 독자인 게 맞다.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글은 타인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글감이 되지 못하는 내용은 잘난 척이 될 만한 것들, 과시하는 내용들이다. 

김경희 작가를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에서 와닿은 부분이다. "내 얘기는 나만 재밌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확장 가능한 경험이어야 한다. 


홍한별 번역자의 인터뷰를 담은 「번역자의 마음」은 통번역자로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의역이냐 직역이냐 하는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 결국은 그 책의 목적이 무엇이냐, 독서가 어떤 경험이 될 것인가, 목적에 맞춰 번역해야 한다고 봐요. 의미에 충실해야 하는 책이 있고 술술 잘 읽혀야 하는 책이 있어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가 없죠.

많은 일이 그렇지만, 번역에도 정답은 없다. 분명한 오역을 제외하고는 콘텐츠의 성격, 목적과 대상에 따라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번역이 있을 뿐. 지난 15년 간 몸담은 분야다보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읽었다.


편집자, 제작자, 마케터 인터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은 책 만드는 건 공동작업이며 관계 구축이 중요하다는 점. 사람을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혼자서는 좋은 책을 만들고 판매할 수 없다고 인지한다. 각자의 고충과 서운함이 있지만 상대의 업무와 입장을 이해한다. 각자 자기의 목표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 입맛대로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다고. 


책도 '판매'되어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라고 말한다. 

책엔 분명 사회적 역할이 있지만 되도록 많이 팔면 좋은 상품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하거든요. (...) 잘나가는 책과 그 책의 독자들을 무시할 게 아니라 왜 그 책이 잘 팔리는지 내용과 형태 양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그 책을 구입했는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직업은 다르지만 출판계라는 세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읽으면서 고마움과 부러움을 느꼈다. 과도한 업무량과 어려운 환경에서 좋은 책을 세상에 내놓고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 고마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대한 꿈과 열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부러움을. 인터뷰이들이 전하는 마음은 꼭 그 직업이 아니더라도 일하는 태도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것들이다. 특히 1인출판사 이정규 대표의 말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남탓 세상탓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따끔한 충고가 된다. 

1인 출판사라고 해서 억울함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말자. 업계에서 특별히 선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악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다. 지업사가 나한테만 나쁜 종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가 나한테만 나쁜 표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서점도 마찬가지다. 1인출판사라도 책이 좋으면 올려주고 아니면 말고다.

정부 규제 탓, 대기업 횡포 탓, 중국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해서 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책을 만드는 단계의 일부분을 담당할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일단은 독자로서 열심히 책을 읽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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