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토끼 Jun 12. 2021

아는 토끼

dedicated to 토리미

근데 토끼 이름 지어줘라. 이름도없어. 그냥 bunny.


토끼 목욕재계 사진을 보여주자 엄마가 말했다. 함께한 세월이 이제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얘는 그냥 토끼다. 침대 한 켠을 지키고 출장과 여행 등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가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동행하지만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아는 토끼에요"라고 답한다. 마흔에 애착인형이라고 하기 부끄럽지만 누가 봐도 애착인형인 토끼에게 나는 왜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 걸까.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나에게 토끼는 토리미뿐이라는 마음에서 오는 걸까 생각해본다. 아무도 시키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토끼야"라고 약속하는 바람에 토끼를 좋아하면서도 키우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것처럼. 왠지 이름을 지어주면 토리미가 서운해할 것 같은 생각. 


토리미를 만난 건 2003년 8월 15일이다. 토끼농장에서 토끼분양을 신청하고 잠실운동장역으로 받으러 갔다. 트럭 짐칸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수십 마리 토끼 중 한눈에 들어왔다. 수컷이라는 말에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첫눈에 반한 토끼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토리미는 나에게 왔고 9년 동안 나에가게 행복을 줬다. 


1. 데려온 지 한 달째인 아기 토리미  2. 토리미가 좋아한 카페트 모서리 자리  3. 식물 포식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을 경험하게 해줬고 슬프고 힘들 때도 토리미를 껴안고 있으면 힘이 됐다. 일터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는 가장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싶었다. 끝이 있는 걸 알아도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남겨진 추억으로 그 시간의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줬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관계 맺는 걸 어려워해 마음을 주는 것도, 거둬들이는 것도 매번 쉽지 않은 나에게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관계 맺는 건 사람 간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구글에서의 마지막 1-2년은 '끝난 걸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관계'였고 '더 이상 행복하지 않지만 이만한 사람(회사)을 만날 수 있을까 두려워 떠나지 못하는 관계'였다. 


마음을 여는 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만큼 한 번 연 마음을 닫기는 더욱 어려워 심지어 동물에게까지 내외한다.

강아지 좋아해요?
완전 좋아해요! 근데 남의 개는 관심 없어요.

  개를 좋아해 유기견 임시보호와 해외입양 동행 등 봉사활동에 적극적인 재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개 안 키우시잖아요? 

그렇구나. 내 개가 없는데 남의 개는 안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개가 없는 거잖아?

재은의 반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심지어 개한테도 상처 받을까봐 두려워하나 보다. 마음을 줘도 놀아줄 때 좋아할 뿐, 곧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런던의 공원은 개로 넘쳐난다. 목줄을 매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고 개를 풀어놓는 게 당연해 잔디에서 뒹굴며 흙을 잔뜩 묻히고 연못이 많은 햄프스테드 공원에서는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놀기도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남의 개'를 보며 내 개를 키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는 토끼'를 껴안고 자는 수밖에.


4. 날이 좋아 피크닉 가서 캥거루 놀이  5.  좋은 레스토랑 갈 때도 데려가  6. 커피도 한 모금


매거진의 이전글 잘 해먹고 삽니다 IV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