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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May 24. 2021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관

(2020년 7월부터 작성해놓고 이제야 마무리한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가 이 리뷰를 올리고 싶어서였는데,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이라 생각이 많아 '작가의 서랍'에 1년 가까이 갇혀 있다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올린다.)

 

영화 컨택트(Arrival)』를 보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읽고 다시 영화를 보고, 몇 번을 반복했다. 지구과학을 전공한 이과생이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언어전문가로서, 언어와 과학의 교집합은 나에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소재다. 무엇보다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건 직접 느끼고 경험했기에, 사람의 언어와는 다른 체계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언어

난 하나의 인격체지만, 영어를 쓸 때와 한국어를 쓸 때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주제를 다루는지에 따라 한국어가 편할 때가 있고 영어가 편할 때가 있다. 과일을 자를 때 쓰는 칼, 생선을 자를 때 쓰는 칼이 다르듯. 


한국어는 두리뭉실하고 정확성이 떨어진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해야하나. 주어를 빼고 말해도, 관계사를 생략해도, 문제없이 전달된다. 영어는 정확하게 콕콕 짚어줘야 하는 언어다.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어로 썼을 때 술술 넘어가고 이해가 되는 글도 영어로 번역하면 어딘가 부족하고 앞뒤가 안 맞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반대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지나치게 구체적인 느낌이 든다. 


언어를 습득하면 그 언어에 내재된 사고방식과 문화를 익히게 된다. 인류학자인 사피어(Edward Sapir)와 언어학자인 워프(Benjamin Whorf)는 '언어가 인간의 사교를 규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을 주장했다. 전형적인 한국인 마인드도, 그렇다고 서양의 사고방식도 아닌 나의 세계관을 나는 어렸을 때 영국에 거주하며 익힌 영어 탓으로 돌린다(확인할 길은 없다). 문장에서 주어가 빠지면 헷갈려하고, 새로운 주장을 접하면 그 이유가 궁금하다(물론 그냥 내 성격이 그런 걸지도).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익히게 된다는 설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시간

앞뒤 구분이 없고 한 번에 쓰는 언어를 사용하는 헵타포드(Heptapod)는 시간이 비선형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경험한다. 우리가 3차원이라는 공간을 한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려나 상상해본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er)에서는 중력을 통제할 수 있는, 5차원을 사는 미래의 인류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는 그 시간을 방으로 표현했다. 동영상의 타임스탬프처럼, 시간별 상황을 왔다갔다 하며 경험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만약 시간의 흐름과 관계 없이 내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시간 여행을 다루는 스토리에서는 흔히 미래를 알아도 불가항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없는 설정이 많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The Time Travelers Wife)에서는 주인공이 시공간을 이동할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설정(알몸 이동)으로 제약을 뒀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다음 행동을 예측하면서도 그대로 하게 된다고 표현했다. 훗날 샐러드 그릇이 떨어져 아이의 머리가 다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그릇을 사게 되는 걸, 불가항력으로 하는 행동이 아닌, 너무 당연히 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결과를 알지만 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performing a play(수행한다)’라고 표현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으면서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정해진 각본대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 순간은 내 자유의지로 하게 되는 느낌.


아마도 이 영화/소설을 보고 나면 누구나 떠올릴 질문은 ‘내 아이가 25살에 죽을 걸 알면서도 아이를 낳을까’일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다. 내 손으로 묻어줄 걸 알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마지막이 슬프고 힘들더라도 그 과정은 의미가 있으니까. 함께 한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영화 vs. 소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둘 다 좋았다. 스토리만 보면 소설이 더 좋았지만 헵타포드의 언어를 소설의 텍스트만으로 상상해낼 수 있었을지는 자신이 없다.  


영화에서는 아이가 병에 걸려 죽는데 소설에서는 암벽등반을 하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암벽등반을 하게 되는 이유를 주인공의 과잉보호에 대한 반항심으로 그렸다. 어떻게 보면 아이가 죽을 걸 아는 주인공의 행동이 그 결과를 낳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인 셈이다. 


헵타포드가 지구를 방문한 것도, 영화에서는 3천년 후 인류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인류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설정이지만 소설에서는 불명확하다. 단편소설은 질문을 던지기만 하지만 영화는 해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나온 차이일까. 



다시 봐도 여전히 작가의 천재성에, 영화감독의 상상력과 연출에 감탄한다. 테드 창(Ted Chiang)의 숨(Exhalation)에 수록된 단편에 대한 감상은 이미 작년에 줄줄이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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