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위해 내 영혼을 팔까
한국어판 제목이 궁금해 온라인 교보문고에 들어가보니 검색이 되지 않는다. 아직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나보다. 원제는 『The Invisible Life of Addie LaRue』 직역하면 '아디 라루의 보이지 않는 인생'인데 번역본 제목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행복하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둠의 신과 거래를 한 Adeline의 인생을 그린 판타지 소설이다. 술술 읽히는 재미난 작품이면서 인생과 행복을 생각할 기회를 주는 딱 내 취향의 책이다.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에 감정 묘사가 뛰어나 읽는 내내 공감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1690년대 프랑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Adeline(애칭 'Addie')은 모두가 서로를 알 만큼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 생각만 하면 답답하다. 나이가 차면 동네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사는, 당시 평범한 여성의 삶을 원치 않는다. 어머니의 반대와 꾸지람에도 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를 따라 큰 도시도 다니지만 결국 억지로 혼인을 해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고, 그 날 어둠의 신에게 소원을 빌고 만다.
I do not want to marry. I do not want to belong to someone else. I do not want to belong to anyone but myself. I want to be free. Free to live, and to find my own way, to love, or to be alone, but at least it is my choice, and I am so tired of not having choices, so scared of the years rushing past beneath my feet. I do not want to die as I've lived, which is no life at all.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에게도 소유되고 싶지 않아요. 나 아닌 그 누구의 소유물이고 싶지 않아요. 자유롭고 싶어요. 자유롭게 살아가고, 내 길을 찾고, 누군가를 사랑하든 혼자 있든 내가 선택할래요. 선택권이 없는 데 지쳤어요. 세월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게 무서워요. 지금처럼 살다 죽고 싶지 않아요. 이건 산 게 아니에요. (내맘대로 번역)
원하지 않는 걸 말하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하라는 말에 Addie는 소원을 빈다.
I want a chance to live. I want to be free. I want more time.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원해요. 자유를 원해요. 시간이 필요해요.
얼만큼의 시간을 원하는지 질문에 답을 못하자 어둠의 신이 말한다.
You ask for time without limit. You want freedom without rule. You want to be untethered. You want to live exactly as you please. 무제한의 시간을 원하는 건가. 규제 없는 자유. 얽매이지않는 삶.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라네.
자신은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고 너무 많은 걸 바란다며 거절한다.
You want an ending. Then take my life when I am done with it. You can have my soul when I don't want it anymore. 끝을 바라는 거라면 내가 다 살고 나면 내 목숨을 가져요. 내가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 내 영혼을 주겠어요.
Addie는 이렇게 영혼을 판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Addie는 이 세상 사람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있다. 마을 사람들은 Addie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딸이라고 주장하는 Addie를 미친 여자 취급한다. Addie와 대화를 하다가도 눈 앞에서 사라지면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거지 꼴을 하고 나타난 Addie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던 죽마고우 Isabelle도 남편의 귀가에 시선을 돌린 후 Addie를 들여보내준 게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잊고 아기를 해치러 집에 들어온 침입자로 오해해 내쫓는다.
결국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한 고향 마을을 도망치듯 떠나 근처 도시 르망으로, 파리로 떠난다.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를 제멋대로 해석한 신의 장난으로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다. 글도 그림도. Addie와의 대면과 소통은 Addie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즉시 기억에서 지워져 여관에서 편하게 하룻밤을 보내지도 못한다. 방세를 받은 기억도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음식과 옷을 훔치며 살아간다(돌아서면 잊어버리니 훔치는 건 다행히 쉽다).
Addie가 원하지 않을 때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계약을 했기 때문에 Addie가 영혼을 내놓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이제는 Luc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어둠의 신은 1년에 한 번 찾아와 묻는다. 힘들지 않냐고 그만해도 된다고. 하지만 Addie는 자신에게서 모든 걸 빼앗은 Luc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버틴다. 100년, 200년, 300년을.
그러다 2014년 뉴욕에서 Henry를 만난다. 훔치며 사는 게 익숙해진 Addie는 중고 서점에서 오딧세이 한 권을 들고 유유히 걸어나오다 Henry에게 딱 걸린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리스어 버전을 훔친 게 어이없었는지 Addie에게 그냥 책을 준다. 다음 날 다시 서점을 찾은 Addie는 친구에게 책을 선물 받았는데 이미 있는 책이라서 다른 책으로 교환할 수 있겠냐고 묻고 Henry는 황당해한다.
Word of advice. Next time you try to return a book, don't return it to the same person you stole it from the first time. 충고 한 마디 할게요. 다음에 이렇게 책을 교환하겠다고 찾아올 때는 훔치다 걸렸던 직원에게 다시 오는 일은 없도록 해요.
Addie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You were just here yesterday. 바로 어제 왔었잖아요.
I remember you. 기억해요.
I remember you. 300년 간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도 첫 만남만 반복하던 Addie가 처음으로 자기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Henry도 Luc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쓰며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살아왔다. 자존감이 낮고 우울증이 폭풍처럼 찾아오기를 반복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날, 자살을 생각하다 술김에 신에게 빌었다, 모두에게 충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후, 만나는 사람마다 Henry가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하는 일마다 얼마나 잘 하는지 칭찬일색이지만 사람들이 보는 Henry는 그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버전의 Henry'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전혀 기쁘지 않다.
그러다 Addie를 만났다. 서로의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람을. 행복한 날들을 보내지만 둘을 만나게 한 것은 Luc의 계획이었고 당연히 대가가 있다. 이후의 전개와 결말은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적지 않는다. 수많은 작품이 잘 나가다 결말에서 실망시키는데, 이 책은 마지막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거래 조건 등의 설정이 튼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전개도 없으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구성이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책에서도 장면 묘사와 캐릭터 설정이 뛰어나 아주 볼만한 영화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
이 책이 좋았던 건 무엇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나에게도 영혼을 팔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거래를 할까? 물론이다. 대신 Luc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계약서 조항처럼 꼼꼼하게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소원을 빌어야지 생각한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는 막연한 소원을 빌면 왠지 하루 24시간 마약에 쩔어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 살게 만들 것 같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일일이 나열하다간 분명 틈이 생길 것만 같다.
사실 책 속에 답이 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Henry가 베프 Bea에게 묻는다.
- If you sold your soul for one thing, what would it be? 영혼을 팔아 딱 한 가지를 가질 수 있다면 뭘 선택할거야?
- Happiness. 행복.
- What is that? I mean, is it just feeling happy for no reason? Or is it making other people happy? Is it being happy with your job, or your life, or... 그게 뭔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은 거?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거? 만족스러운 직업을 갖는 거? 아니면 삶의 만족도가 높은 거? 아니면..
- You always overthink things, Henry. I don't know, I guess I just mean I'd want to be happy with myself. Satisfied. 헨리, 넌 항상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더라. 나도 몰라. 그냥 나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싶어.
영화 <아이 필 프리티(I feel pretty)>와 일맥상통하는 주제다. 영화 속 주인공 Renee는 본인이 못 생기고 뚱뚱하다는 생각에 항상 자신이 없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집착한다. 어느 날 실내 사이클링을 하다 넘어진 후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Renee의 태도가 바뀌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도 달라졌다. 자기가 예뻐졌다고 생각한 Renee는 그들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깨닫는다. 바꼈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고 자기의 외모는 내내 똑같았다는 걸.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을 바꿀 순 없지만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바꿀 수 있다. 마음 먹기 달린 거니까. 그런데 그게 가장 어렵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