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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Aug 11. 2021

일도 사랑도 놓치지 않을거야

홍콩에서 온 크리즈 - 욕심쟁이 우훗훗

비가 마구 퍼붓는 일요일, 가성비가 뛰어난 파스타를 자랑하는 Padella Shoreditch 지점에서 크리즈(Kriz)를 만났다. 영국의 코로나 전국봉쇄령으로 에어비앤비 사무실이 문을 닫은 2020년 3월 이후 내내 못 만나다 2021년 4월 말 락다운이 완화된 후 햄프스테드 공원에서 토마(Thomas)랑 같이 잠깐 보고 둘이 따로 만난 건 1년 반만이다.


크리즈를 만난 건 2016년, 에어비앤비 로컬리제이션팀에서 중국어 담당자를 뽑으면서다. 매니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사람을 잘못 뽑진 않겠다'는 마인드로 까다롭게 채용을 하고 있을 때다. 


크리즈는 객관적인 이력에서는 원하는 조건과 달랐다. 중국 본토에서 쓰는 중국어 간체(Simplified Chinese)를 책임질 언어 전문가(Language Manager)를 뽑는 자리였기 때문에 중국어 번체(Traditional Chinese)를 쓰는 홍콩 출신인 크리즈는 모국어 기준에서부터 탈락이었다. 통번역 교육을 받았거나 일한 경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즈를 인터뷰 하면서 잘할 거라는 인상을 받았고 중국 시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중국어 간체를 다룰 능력은 있었다. 고민 끝에 크리즈를 채용했고 내가 에어비앤비 로컬리제이션팀 매니저로서 한 일 중 가장 잘할 일 중 하나다.


크리즈는 처음 해보는 로컬리제이션 업무를 빠르게 익혔고 명확한 의사소통과 문제해결능력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배려심도 많아 함께 일해본 사람은 모두 크리즈를 좋아했다. 


입사 2년 후, 로컬리제이션 프로젝트 매니저(Localization Project Manager)로 지원해 팀내 이동에 성공했다. 샌프란시스코 본사에 있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들과 주로 일하는 로컬리제이션 프로젝트 매니저는 본사에서만 채용했는데 싱가폴에 있는 크리즈가 뽑힌 건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딸을 시집 보내는 심정으로 같은 팀이지만 다른 매니저 밑으로 크리즈를 보냈다.


1. 싱가폴 사무실 부스에서 일하는 크리즈  2. 할로윈에 싱가폴 출장 가서 코스튬 입은 크리즈와 함께  3. 한국어 담당자 현아님과 셋이 샌프란시스코 공항 라운지에서


직원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크리즈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 배울 점이 많다. 로컬리제이션 프로젝트 매니저로 전환한 2018년, 크리즈는 샌프란시스코 본사로 이동하겠다고 결심한다. 본사에서 일하면 훨씬 더 기회가 많기 때문에 나도 그 결정을 반겼다. 까다로운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지만 첫 번째 시도에서 떨어졌고 보충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크리즈는 마음을 바꿨다. 


비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장거리 연애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도 한몫 했다. 한편으로 한발만 더 내딛으면 기회가 많은 본사로 갈 수 있는데 조금만 더 버티지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일(커리어)만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크리즈의 결단력과 확고한 가치관에 감탄했다. 비자 신청 과정에서 이미 회사에서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직속 매니저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시간을 써 눈치가 보였을 텐데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아는 크리즈였다. 


그 뒤 2년 정도 싱가폴에서 일하다 2020년 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런던으로 옮겼다. 프랑스에 사는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2020년 8월 크리즈는 에어비앤비를 퇴사하고 페이스북으로 이직했고 지금은 런던 생활을 힘들어하는 토마를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페이스북이 전 세계 어디서든 일해도 된다는 정책을 내놓은 게 도움이 됐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크리즈를 보며 많이 배운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안다. 행복하지 않지만 변화가 두려워 꾸역꾸역 현실을 유지하는 누구(?)와 다르게. 따뜻하고 공감력이 뛰어나 락다운 중에 혼자 단칸방에 지내는 나에게 자주 연락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오겠다며 주소를 물어봤다. 크리즈가 런던을 떠난다면 남겨진 나는 매우 슬프겠지만 일과 사랑 그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 크리즈의 선택을 믿으며 응원한다. 크리즈와 토마 둘 다 내 팀원이었어서 그 어떤 커플보다 잘됐으면 한다. 내가 안 뽑았으면 못 만났을지도 모르니 내 덕이라고 혼자 뿌듯해한다. 


런던에는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다. 모두 각자의 고민과 사연을 갖고 용기와 결단을 내 이곳에 살고 있다.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꿈과 사랑을 찾는, 런던의 여러 크리즈와 토마들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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