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는 영국 개로 태어날거야
다음 생에는 토끼로 태어날거야.
오리털 패딩에 두꺼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집을 나서는 추운 겨울날, 카펫 구석자리에 앉아 나를 지켜보는 토리미의 모습에 '토끼 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본래 개를 좋아하는 사람(dog-person)이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 키우게 해달라고 조르고 조르다 겨우 허락 받은 게 토끼였을 뿐. 영국에 머물며 개를 키우고픈 욕구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런던 곳곳에 있는 공원은 개 천지다. 정말 '나만 개 없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영국 반려견의 하루 평균 활동시간이 177분이라고 하니 공원에 개가 많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리트리버에서부터 다양한 불독도 자주 보인다. 공원 안에서는 목줄을 풀어놓는 경우가 많아 자유롭게 뛰어논다. 뭐라도 먹고 있으면 관심을 갖고 다가와 개를 무서워하는 유진이가 식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영국 성인 4명 중 1명은 개를 키우며 전국 개체수는 960만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2021년 기준). 반려묘 수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무래도 매일 산책을 시키는 개가 눈에 띈다(토끼를 키우는 비율은 2%로 90만 마리다).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키우는 견종은 래브라도 리트리버, 프렌치 불독, 코커 스파니엘이다. 비교하자면 한국은 반려견이 있는 집이 480만 가구, 개체수는 580만 마리, 한국의 인기 견종은 몰티즈, 푸들, 포메라니안이다.
영국인들의 개 사랑은 남다르다. 1859년 영국에서 최초의 독쇼(Dog Show)가 열렸고 지금은 1년에 3000회가 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영국 케널 클럽(Kennel Club)은 1873년 설립된 세계 최고 권위의 애견단체로 케널 클럽에 독립 품종으로 등록되면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명품견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라나라 진돗개는 2006년 등록됐다.)
영국 왕실은 대대로 개를 키웠고 각자 좋아하는 견종이 있어 한 브리드를 키우는 게 전통처럼 됐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는 코기를 좋아해 평생 서른 마리가 넘는 코기를 길렀다. 코기와 닥스훈트의 교배로 나온 도기도 여러 마리 키웠고 지금은 그 중 한 마리인 캔디만 남았다.
찰스 왕세자는 어려서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키웠지만 그 후로는 오랫동안 잭 러셀 테리어를 여러 마리 키웠고, 윌리엄 왕세손은 코커 스파니엘을 좋아한다.
영국 반려견의 평균 활동시간 하루 177분은 한국의 주중 59분(주말 84분)의 3배에 달한다. 영국의 녹지의 분포 등 도시 환경이 한국과 확연히 다르지만 다른 유럽국가나 미국, 호주에 비해서도 높다. 영국인들이 이렇게 개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이 산책을 좋아한다는 데서 주 원인을 찾는다. 여기에 내향적인 영국 사람들이 개를 매개로 대화를 하고 훈련이 잘 된 개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거리로 삼는 것도 요인으로 꼽았다. 이유가 어찌됐든 목줄 없이 신나게 풀밭을 내달리는 강아지들을 보고 있으면 토끼가 아니라 영국 개로 태어나볼까 살짝 마음이 흔들린다.
얼마 전 켄싱턴 가든을 걷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주인 옆에 누워 있는 리트리버를 봤다. 불편해 보여 유진이에게 한 마디 했는데 자기 얘기하는 줄 알았는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입에 물고 있던 공을 발 앞에 떨구고 빤히 쳐다본다. 공을 주워 힘껏 던져줬더니 못 찾고 헤매 결국 내가 찾았는데 굴하지 않고 자꾸 던져달라 하더라. 주인에게 물어보니 '코나'라는 암컷 리트리버, 이런 일이 종종 있는지 주인은 관심이 1도 없다. 덕분에 남의 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개 키우고 싶다고 외쳐보지만 안정적인 거처도 없는 지금, 공원에 가면 달려드는 남의 개와 뭉치로 대리만족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