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무주택자의 설움
2021년 9월 말 친구와 함께 지내던 런던 집을 비우면서 돌아와 또 집을 구할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2018년 10월 더블린으로 이주한 이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처가 없는 생활을 3년 넘게 하고 있다. 2021년 초부터 9개월 간 친구와 함께 지냈던 곳이 잠시나마 정을 붙이고 살았던 곳이다.
런던으로 돌아갈 1월이 다가오면서 데자뷰를 느낀다. 2020년 1월 런던으로 옮겨 수십 개의 집을 둘러보며 끙끙대며 고민한 후 3월에 겨우 입주한 집에서는 겨우 한 달 반 머물고 코로나를 피해 한국으로 들어와 버렸다. 최소 6개월이 지나야 계약을 종료할 수 있어 그 뒤 4개월을 빈 집에 비싼 월세를 내고 8월 말에야 원격으로 짐을 뺐다. 2021년 1월에는 친구와 함께 살 집을 구해 들어갔고 2022년 1월, 이 한 몸 누일 집을 또다시 찾고 있다.
집이 거주의 목적보다는 투자의 수단으로 더 가치있게 여겨지는 시대지만 순수하게 ‘사는’ 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2019년 더블린에서 경험했다. 더블린은 ‘주택 대란(housing crisis)’이라고 부를 정도로 집 공급이 부족하다. 2008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건설회사들이 도산했고 진행 중이던 건설 프로젝트가 줄줄이 중단됐다. 그 뒤로 더블린 출장을 가면 곳곳에 멈춰선 대형 크레인이 즐비했던 기억이 난다. 아일랜드의 30만 개 빈 집을 다시 채우려면 43년이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2015년 한 해에만 아일랜드 GNP가 26.3% 오르며 경기가 빠르게 회복했다. 아일랜드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테크 기업들이 더블린에 투자를 늘이며 일자리를 찾아 외국인들도 모여 들었다. 나도 그런 외국인 중 하나였다. 2018년 10월 더블린으로 이주하고 그해 연말까지는 임시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지내다 2019년 초, 본격적으로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더블린은 워낙 작기도 하지만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웬만한 곳은 걸어다닌다. 걷고 싶지 않아도 구글 지도에서 길찾기를 해보면 도보나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나 소요 시간이 비슷해 그냥 걷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비가 자주 오고 바람도 거세 우산도 소용없는 날이 많다는 것. 그래서 사무실에서 가까운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에어비앤비 사무실은 더블린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그랜드 카날 독스(Grand Canal Docks)에 있어 테크 기업에 다니는 고소득 세입자들이 월세를 죄다 올려놓았다. 두어 달 헤매다 월세 2,000유로(약 270만원)를 내고 방 1개짜리 아파트를 구하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어 플랫메이트와 함께 지내는 집을 구해 들어갔다. 플랫메이트가 집주인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대등한 입장으로 집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것, 잠시 일을 쉬고 있어 하루종일 집에 있을 거라는 것 등이 모두 위험 신호였어야 하는데 이런 걸 처음 해보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갖고 들어갔다.
4월 말, 집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고 2개월 만에 짐을 싸서 도로 나왔다. 그 뒤 더블린을 떠나는 날까지 아예 집 없이 에어비앤비를 전전하며 그야말로 ‘홈리스(homeless)’ 생활을 이어갔다. 3주에 한 번씩 출장을 갔기 때문에 비싼 월세를 내는 게 아깝기도 했고, 다시 이상한 집을 구하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전에도 출장을 자주 다니긴 했지만 다녀와서 지친 몸을 누일 내 집, 내 방, 내 침대가 있는 것과 없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깨닫는 2019년이었다.
영국 부동산 시장도 공급 부족이다. 집을 구하는 세입자가 항시 대기 중이라 나오는 족족 채가니 집주인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어 ‘집주인의 시장(landlords’ market)’이라는 표현을 쓴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이전하거나 자국으로 돌아가 런던 월세가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봤자 월 2,000파운드(약 320만원) 아래로 살 만한 집을 구하기 쉽지 않다. 친구와 함께 살 때는 월 2,800파운드(약 450만원)를 내고 방 2개 화장실 2개짜리 아파트에 살아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으로 넓고 쾌적하게 지냈다. 그래서 다들 플랫메이트를 구해 집을 함께 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방역 개념이 우리와 사뭇 다른 런더너와 함께 살 생각은 없다. 월세가 너무 아까워 런던에 집을 그냥 사버려야 하나 고민 중이다.
예쁜 식기가 보여도 짐이 될까 선뜻 구매할 수 없고, 탐나는 러그가 눈에 띄어도 사봤자 펴놓을 곳이 없다. 집주인의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꿀 수 없으며 유치한 스티커를 창문에 붙여놔도 마음대로 떼어낼 수 없다. 중요한 서류를 받을 일이 있으면 회사 주소를 쓰게 되고, 따라하고 싶은 인테리어 컨셉을 발견해도 언젠가...로 미뤄둔다.
런던 집은 빼고 서울 부모님 집에 머물고 있는 지금, 영국 부동산 사이트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이 몸뚱이 하나 놓일 집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스크롤한다. 아 글로벌 무주택자의 설움이여. 언젠간 내 집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금은 별점 2개만 줄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