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태풍과의 인연
2월 18일 금요일, 태풍 유니스(Storm Eunice)가 영국에 상륙하면서 곳곳에 기상 경보가 내려졌다.
영국의 기상 경보 시스템은 발생 가능성과 예상 피해 정도에 따라 yellow, amber, red 세 가지 단계로 되어 있다. 발생 가능성이 낮거나 피해 정도가 높지 않을 때는 yellow 경보, 교통이나 전력 등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아지면 amber 경보, 인명 피해까지 우려되는 정도일 때는 red 경보를 내린다.
시속 196km(초속 54.5m)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 유니스로 140만 가구의 전력이 끊기고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 수백 개가 휴교했으며 항공편도 줄줄이 결항됐다. 교량이 폐쇄되고 기차도 운항이 중단되거나 제한속도를 낮춰 운행했다. 런던의 유명 콘서트가 열리는 대형 실내 경기장인 O2 아레나의 지붕이 뜯겨져 나가 당일 공연이 취소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태풍 유니스는 거의 30년만에 가장 강력한 태풍이었다고 한다. 런던에 red 경보가 내린 것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코로나 전 마지막 출장이었던 2020년 2월 9일에도 태풍 키아라 때문에 히드로 공항에 무려 10시간 갇혀 있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왔었다. 오전 11시 항공편이라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태풍 때문에 계속 지연되더니 (30분씩 찔끔찔끔) 결국 오후 2시 넘어서야 결항시켰다. 문제는 수하물을 찾으려면 분실물 신고를 해야 해서 다시 줄을 1시간 넘게 섰고(줄줄이 결항되어 짐을 찾으려는 승객이 공항 가득이었으니) 수하물은 다음 날 집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더라는. 출장을 안 갈 수는 없어서 그 다음 주인 2월 15일에 다시 티켓팅 해서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는데 그 날은 태풍 데니스(히드로 공항 착륙 영상)가 상륙해 아슬아슬하게 영국을 뜰 수 있었다.
15년 전에도 영국 태풍과 인연이 있었다. 구글에 입사하고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3주 연수 후 곧바로 더블린 출장을 가게 되어 경유 차 런던에 들렀다. 초등학교 때 영국에서 거주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는 것이었다. 회사 동료와 뮤지컬도 보고 어릴 적 친구들도 만나며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3월 9일 일요일 오후, 더블린으로 가기 위해 게트윅 공항을 찾았다. 런던에서 더블린까지 한 시간이면 가는데 태풍 요하나로 공항에 6시간 가까이 발이 묶여 있었다. 너무 지루해 공항 오락실에서 인형뽑기를 해 인형을 안고 탄 기억이 난다.
밤늦게 더블린에 겨우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강풍으로 나가지 못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때 시킨 나시고랭이 내 평생 맛본 가장 맛없는 음식이었다. 아직까지도 이 기록을 깬 음식은 없다. 맛없기로 유명한 아일랜드에서 감히 동남아 음식을 시킨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리오. 결국 거의 손도 안 대고 회사 동료가 한국에서 가져온 모나카를 대신 먹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수진님 너무 고마워요!)
영국에 온 다음 해 겨울, 한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 분명 눈 구경하기 힘들다던 영국이었는데 뜻밖의 폭설이 내렸다. 어린 나는 그저 신나게 놀았던 기억뿐이지만 당시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겨 수십만 가구에 피해를 줬다고 한다. 워낙 눈이 드문 나라라 아직도 이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아놓고 보니 참 영국 태풍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앞으로 또 어떤 태풍을 만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