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보는 전쟁
3월 1일 화요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영상 연설을 전달하는 유럽 의회 통역사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날 아침 하르키우/하리코프(Kharkiv)에 순항 미사일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전달하며 그곳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최대 광장인 '자유 광장'을 언급했다.
This is called the Freedom Square. Can you imagine this morning two cruise missiles hit this freedom square. Dozens of dead ones. This is the price of freedom. We’re fighting just for our land and for our freedom.
이곳은 '자유 광장'이라 불립니다. 오늘 아침 자유 광장에 순항 미사일 두 발이 떨어졌습니다. 수십 명이 희생됐습니다. 이게 자유의 대가입니다. 우리는 우리 땅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나왔고 세르게이 라브로프(Sergeĭ Lavrov) 러시아 외무장관이 발언하자 다른 대사들은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떴다.
이렇게 전 세계가 러시아의 군사 행동을 지탄하며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는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많은 서방 국가가 우크라이나에 군사 물자와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3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군사적 개입은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건 우크라이나 국민만이 아니다. 강력한 경제 제재로 러시아 국민들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살기 위해 피난을 가거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으며 다른 한 쪽은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한 지도자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어느 쪽도 얻는 게 없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영국에서 지켜보는 전쟁은 느낌이 다르다. 한국인으로서 유럽의 역사에 감정적으로 공감하긴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서 유럽인들의 충격이 느껴진다. 유럽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과거 유럽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기억(혹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떠올린다. 수십 년간 공들인 러시아와의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진 상황에서 배신감과 허탈감을 느끼고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무엇보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아는 사람들이 있거나 최소한 한 다리 건너라도 지인이 있기 때문에 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로컬리제이션 분야에서 일한지 16년차인 나도, 당연히 두 나라에 아는 사람들이 있다. 150개 언어로 제공되는 구글에서 일할 때는 물론이고 60개 언어로 번역되는 에어비앤비에서도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고 구글에서 함께 일했던 러시아어 언어 전문가 맥스(Max)가 링크드인에 올린 게시글에 마음이 아팠다.
맥스의 어머니는 러시아 사람,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며 조카는 러시아 공격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맥스는 러시아 사람으로서 조국을 사랑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무력함을 느낀다.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넘쳐나지만 러시아 국민들은 결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한 정신나간 지도자의 결정이라고.
이 시점에 러시아 사람으로서 이런 글을 올릴 때 맥스가 얼마나 고민하고 또 망설였을지,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물론이고, 러시아 사람들도 피해자다.
러시아가 공격을 개시한 며칠 후인 2월 26일, 에어비앤비 보안 팀에서 이메일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고위험지역으로 추가되면서 그 지역에서 에어비앤비 사내 네트워크에 접속이 차단될 예정이라고. 내가 관리하는 인력 중 우크라이나 또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 인원이 있기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로컬리제이션 팀은 번역사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고자 번역업체와 논의 중이었고, 이제 추가로 번역사들의 접속이 차단될 수 있다는 공지를 전달했다. 번역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안전을 확인할 것과 동시에 대체 인력을 확보할 것을 요청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영국에서 비행기로 3시간이면 도착하는 우크라이나에서는 생사가 오가는데 나는 번역에 차질이 없도록 대체 인력을 구하고 있다니. 업무상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가 싶었다. 우크라이나어 번역사들 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암울함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준 건 역시 사람이다. 에어비앤비는 즉각적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무료 숙소 제공에 나섰고 3월 7일 기준, 일주일만에 1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숙소를 제공했고 120만 달러가 넘는 기부금이 모였다.
여기에 한 에어비앤비 사용자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하고 "당연히 방문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호스트에게 보낸 사연이 알려지면서 "에어비앤비 착한 노쇼" 운동이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일반 시민에게 즉각적으로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부 채널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2일에서 3일까지 불과 이틀 만에 61,000박이 넘는 예약이 들어왔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190만 달러(약 23억1,300만 원)가 일반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전해지는 셈이다. 물론 에어비앤비는 우크라이나 숙소 예약 건에 대해서는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번역사들과 일하는 로컬리제이션 매니저로서, 에어비앤비 직원으로서 여러가지 감정이 든다. 가깝지만 멀게도 느껴지는 전쟁. 가까운 대륙에서 생사가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러시아 가스를 수입하는 영국의 가스비 정도라는 거리감, 동시에 내가 직접 알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과 죄책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따스한 말 한 마디 전하는 것. 그냥 내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에어비앤비 노쇼 운동에 동참하는 것. 2년째 코로나가 어서 끝나기를 빌었는데 이 전쟁이 먼저 끝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