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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Feb 13. 2022

선불제 난방이라니

생존 모드

공급 부족이 심각한 런던 부동산 시장에서 집을 구하려면 돈이 많거나 시간이 많아야 한다. 올라오는 즉시 기다리던 세입자들이 달려들기 때문에 오늘은 바빠서 내일 보러 가야지 하면 이미 늦는다. 3년 연속 런던에서 런던에서 월세집을 구하는 분투기는 다음에 자세히 쓰기로 하고, 오늘은 겨우 구한 집으로 들어간 그저께, 2월 11일 이야기를 하련다. 


월세 계약은 2월 9일로 했기 때문에 수요일 오후에 열쇠를 받고 간단한 청소와 소독만 하고 묵고 있던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갔다. 체크아웃이 토요일이었으니 여유를 갖고 다음 날 창고에 보관해둔 짐을 찾아 정리하고 실제로 들어간 건 금요일. 오전에 짐을 갖다놓고 인터넷 설치가 안 돼 곧장 사무실로 가 회의를 하고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씻으려고 하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부동산에 연락을 하니 집주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하더니 하는 말이 여기 난방과 온수는 충전식 서비스라 돈을 충전시켜야 나온다는 것. 그걸 이제야 말한다고? 황당해서 충전을 어떻게 하냐 물어보니 무슨 디바이스에 번호가 있을 거라며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한다. 계정 번호가 있어야 온라인으로 충전할 수 있는데 번호를 못 찾아 우편함에 혹시 우편물이 있을 수 있으니 찾아봐라 등등 똥개 훈련을 시키더니,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나 - 부동산 에이전트 - 집주인 을 오가는 대화 끝에 결론은 계정을 새로 만들어야 충전할 수 있는데 이미 금요일 저녁이라 고객센터가 문을 닫았다고. 하.. 이게 머선 일이고?


1 & 2. 난방 스마트 미터기 - 심지어 24.35 파운드 마이너스다


세입자에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지만 사전 충전식 난방이라니, 정말 듣도 보도 못했다. 공과금을 몇 달 밀려 전기, 수도가 끊기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선불이라니.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겨우 집을 구해 좀 안정을 찾는가 했더니 기본적인 욕구부터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라니. 유진이가 쓰던 전기장판을 남겨둔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그래도 이불 속은 따뜻했다. 다음 날 호텔로 옮길까 고민했는데 짐을 또 챙기고 몸을 이동하는 게 너무 싫고(한 달 새 세 번이나 짐 쌌다) 생각보다 집이 아주 춥진 않아서 그냥 관뒀다. 전날 주문한 전기포트가 마침 배송돼 물을 끓여 머리를 감았다.


3. 전기장판이 나를 살렸다  4. 물 끓여 바가지로 퍼서 감는 머리


어제(2월 12일 토요일)는 친구가 전기 히터를 갖다 줘서 그래도 비상용 난방기구는 마련했고 동네 지인은 자기가 다니는 헬스장에 게스트 한 번 데려갈 수 있다며 같이 가서 샤워하자고 제안도 해주셨다.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잊고 있었던 걸 깨닫는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같이 욕하고 분노해주고, 밤새 춥지 않았냐고 걱정해주고, 자기 집에서 샤워해도 된다고 편하게 오라고 말해주고.


이럴 때 사람들과의 관계가 선명해진다. 금요일 저녁, 현지 친구 몇몇과 왓츠앱으로 분노의 채팅을 나누고, 마침 전화 온 동네 지인에게 하소연도 하며 웃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몸도 녹일 겸 간 카페에서(정작 거기가 더 추움) 한국에 있는 친구와 카톡을 주고 받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화내고 짜증내지만 슬퍼하진 않는데(원래도 슬픔을 억제하는 병이 있지만) 역시 의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기대고 싶은가 보다. 이런 일 있었으면 바로 얘기하지 그랬냐며 얼마나 서러웠냐는 말에 눈물이 흘렀다. 반대로 이럴 때 얘기해봤자 더 속 터질 것 같은 사람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부모님에게는 상황을 전하지만 마음 아파하시니 마음껏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고마운 사람들. 

월요일에는 이 사태가 해결되길 바라며(영국은 바로 해결될 지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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