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N차 관람이라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영화보다는 연극과 뮤지컬로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저예산 공연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취지로 시작한 게 멀티캐스팅 공연의 경우 다른 배우를 보려고 여러 번 보러 가기 시작했고, 지난 티켓을 제시하면 할인을 적용해주는 공연도 생겨났다. 이젠 공연뿐 아니라 영화도 N차 관람이 유행하면서 SNS에서 N차 관람을 인증하며 팬심을 자랑하는 현상도 보인다.
어렸을 때 본 영화를 또 보는 건 명절에 TV에서 우려먹는 영화들이었고, 본 영화를 또 보러 영화관에 가는 건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내 첫 N차 관람 영화는 <번지점프를 하다>로 기억한다. 이병헌과 이은주 두 주연배우의 매력이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로 풋풋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외에도 나를 사로잡는 요소들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 새내기였던 나는 동성애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관심도 없었고 의견도 없었다. 그런 백지장 같은 나에게 <번지점프를 하다>는 동성애를 보는 시선을 제시해줬다. 물론 환생이라는 판타지를 담은 스토리지만 죽은 연인 태희(이은주 분)가 현빈(여현수 분)으로 환생해 동성인 제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우(이병헌 분)를 그려 동성애도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현빈의 손을 잡고 함께 절벽을 뛰어내리는 장면에 나온 인우의 나레이션이다. 너무 좋아서 나는 무조건 저기서 번지점프를 하겠다고 생각했고, 10년 후 뉴질랜드 퀸즈타운의 카와라우 다리(Kawarau Bridge)에서 뛰어내리며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몇 초 안 되는 자유낙하의 순간, 그런 해방감은 처음 느껴봤다. (그로부터 9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또 뜀.)
또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건 태희가 인우와 산채비빔밥을 먹는 장면이다.
인우야 너 국문과지? 나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젓가락은 시옷 받침이잖아, 근데 숟가락은 왜 디귿 받침이야? 수에 디귿 받침인 글자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말을 안 하겠는데 국어사전 찾아보면 숟가락 딱 하나밖에 없거든. 어차피 두 개가 발음도 똑같은데 숟가락도 시옷 받침 해도 되잖아?
대답을 얼버무리다 그건 4학년 돼야 배운다는 인우의 대사에 웃게 되는 사랑스러운 장면인데 난 와..씨, 저거 영어 자막 어떻게 달아?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때는 통역대학원을 갈 거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던 때였고(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과학자를 꿈꿀 때인데도 좋아하는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욕구는 그때부터 있었나보다. 막 고민했다. 아니 소설이면 주석이라도 달지, 몇 초 안에 전달해야 하는 영화 자막에서 저걸 어떻게 하냐고? 영어 스펠링으로 대충 전달할 수도 있는데 뒤이어 인우가 젓가락은 이렇게 집어먹으니까 시옷 받침 하는 거고 숟가락은 이렇게 퍼먹으니까 디귿 받침 하는 거지... 하는데 진짜 저건 답 없다 ㅋㅋㅋㅋ 근데 너무나 좋아하는 장면이다. >.<
해외 생활을 하면서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여러 번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마음이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드라마를 보고 또 본다. 대표적인 건 <동백꽃 필 무렵>. 마음이 전기장판 켜놓은 듯 따끈해지는 드라마라 외롭고 힘들 때 찾는다. 2020년 3월, 영국 첫 락다운 때 집에 갇혀 지내며 또 봤더랬지.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로 요약되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나의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도 여러 번 봤다. 정말 재밌게 보고 잘 만들었다 싶은데 다시는 못 보겠는 드라마도 있다. <미스터 션샤인>. 마음이 아파서 또 보고 싶은데도 엄두가 나지 않는 작품.
얼마 전 나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안겨준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물 구현이 기가 막혀 다른 좌석 다른 각도에서 또 봐야겠다고 결심한 작품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와 뮤지컬 모두 여러 번 봤고. <레미제라블>도. 다른 장르지만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책도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10권인데도 네 번 이상 봤는데 볼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책 얘기로 넘어가면 또 끝이 없으니 여기서 그만.
글을 적다보니 <번지점프를 하다> 또 보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니 조만간 다시 봐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