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기고 싶은 자유
2021년 유진이랑 Big Jo에 갔을 떄의 일이다.
베이커리이자 저녁에는 조각피자와 다양한 타파스 느낌의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으로 야외 좌석이 있어 선택했다. (당시 우리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야외 좌석이 있는 곳에서만 외식 했다.) 빵과 샐러드, 부라타와 조각 피자를 맛있게 먹고 디저트를 고르는데 선택 장애가 찾아왔다. 이미 배는 부르고 둘이 하나만 시켜서 나눠 먹고 싶은데 메뉴에 있는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먹고 싶은 거다.
- 피스타치오 소프트 아이스크림 & 쿠키 & 라즈베리(Pistachio Soft Serve, Shortbread & Raspberry)
- 구운 복숭아 타르트 & 커스터드(Roast Peach, Frangipane & Custard)
피스타치오라면 환장하고 커스터드 뿌려주면 모든 디저트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커스터드 그냥 퍼먹어도 맛있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며 나에게 선택권을 준 유진. 메뉴판을 붙잡고 한참을 고민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추천을 부탁하니 메뉴를 자세히 설명해주며 피스타치오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아마 이번 주가 마지막일 거라 말한다(메뉴가 매일 바뀌는 레스토랑이다). 그래도 구운 복숭아 타르트에 커스터드라니. 도저히 포기가 안 돼 또 한참을 괴로워했다.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 수준으로 큰 결심을 먹고(옛날 사람) 다시 직원을 불러 타르트를 주문했는데 잠시 후 직원이 디저트 접시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너무 고민하길래 둘 다 먹어보라고 서비스라고. 횡재했다.
나의 선택 장애가 득이 된 아주 드문 케이스다.
일상에서 음식 주문조차 어려워하는 나는 선택이 괴롭다. 그리고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런던의 살인적인 월세를 더 이상 내고 싶지 않아 집을 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집주인에게 매달 내는 월세보다 은행 대출을 받아 그 집을 사서 매달 갚아야 하는 액수가 오히려 적으니 사지 않는 게 바보다(바보로 몇 년을 살았다). 사야겠다는 확신은 들었는데 어떤 집을 살 것인지, 1월부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국처럼 정형화된 아파트 위주의 주거 환경이 아니라 집 하나하나 구조와 조건과 환경이 다르고, 땅 주인은 따로 있는 개념(leasehold vs. freehold)도 있어 공부해야 할 것 투성이다. (런던에서 집을 사는 속 터지고 머리 터지는 이야기는 따로 자세히 적을 예정..)
금전적으로 손해 보더라도 그냥 월세 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 받으며 문득 나의 아저씨 렌(Renn)이 떠올랐다. 지난 7년 여간 출장지가 겹칠 때마다 렌을 만나며 변하지 않은 건 식당 선택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긴다는 것. 처음에는 렌의 의견도 반영하고자 음식 취향을 묻거나 식당 몇 군데를 알아본 뒤 공유하곤 했다. 그러다 차차 렌이 링크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Whatever you like(네 맘대로)"로 일관한다는 걸 깨닫고 어느 순간 한 군데를 골라 어떤 종류의 음식인지 정도만 간단히 덧붙여 "Would this work(여기 어때)?"라고 묻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다른 중한 일이 많은 렌은 한 끼 식사를 고르는 데 굳이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만나면 수다 떠느라 바빠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면 그제서야 메뉴판을 보는 척하다 그냥 추천해달라고 맡긴다.
매번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려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스트레스 받고... 그래도 여전히 후회할 일은 생기고. 이런 삽질을 반복하면서 신경을 써야 할 것만 취사선택해서(이것도 선택이구만) 에너지를 쏟고 나머지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인생 지침서로 모시는 『신경 끄기의 기술(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uck)』을 다시 집어들 때가 온 듯.
끝까지 보진 않았지만 꽤 오래 좋아했던 시트콤 빅뱅 이론(The Big Bang Theory)에서 쉘든(Sheldon)은 일상의 사소한 선택을 하는 데 시간 낭비하기 싫다며 선택을 대신 해주는 주사위를 만든다. 그리곤 배달음식 메뉴를 고르는데 원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주사위를 던지던 쉘든.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어(말 안 들을 거면서) 웃기면서 공감했던 에피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