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든든한 후원자
런던으로 건너오기 전인 2019년, 나의 암울한 더블린 생활에서 구원의 손길은 렌(Renn)이었다. 렌을 처음 알게 된 건 2015년 에어비앤비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였다. 렌은 에어비앤비 창업자들의 코치로 특히 CEO 브라이언 체스키(Brian Chesky)가 많이 따랐다. 에어비앤비 초창기부터 함께 회사를 키워왔기 때문에 직원들과도 가까웠고 전 세계 에어비앤비 지사를 다니며 교육과 코칭을 했다. 당시 내 매니저였던 알무데나(Almudena) 역시 초기 멤버로 렌과 친했고 나와 내 동료에게 관리자 교육을 부탁했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을 주로 교육하는 렌에게 1:2로 과외를 받게 된 건 순전히 알무와의 친분 덕분이었고 지금도 내 상사로서 알무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렌이라고 생각한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만남에서 렌의 통찰력과 따뜻한 시선에 반했다. 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자료도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 나와 내 동료 샘(Sam)의 얘기를 듣더니 정곡을 콕콕 찌르는 말들을 풀어냈다. 우리의 고민과 고충을 꿰뚫고 있었다.
일회성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렌과의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계기는 마라톤이다. 렌은 1년에 여러 차례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었고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먼곳까지 가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Do you know Chuncheon(춘천 마라톤 알아요?)" 춘천 마라톤이 얼마나 멋진 풍경을 보며 뛰는 대회인지 설명했다. 정작 나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렌이 그 말을 기억하고 진짜로 춘천 마라톤을 뛰러 올 줄은 몰랐다.
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렌은 풀코스를 뛰었고 나와 동료 두 명은 10km를 뛰었다. 일주일 전쯤 한국에 도착해 에어비앤비 코리아 직원들과 1:1 코칭을 해주고 마침 한국 방문 일정이 있었던 창업자 네이트 블레차르치크(Nathan Blecharczyk)와 광장시장에서 떠들썩한 회식도 함께 했다. 마라톤 전날 오후 용산역에서 함께 기차를 타고 춘천에 도착해 닭갈비를 먹고 다음 날 뛰었다. 며칠 전까지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이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공기가 좋아 상쾌한 마음으로 뛰었다.
렌은 마라톤을 뛰고 나면 그 마라톤을 기념하는 문신을 새기는 리추얼이 있었다. 한글로 새기고 싶다며 디자인을 부탁했고 코리아팀 직원들과 함께 만들어 렌의 몸에 우리의 추억을 새겼다. 그 뒤로 서로 출장이 잦아 샌프란시스코, 싱가포르, 더블린, 런던 등 일정이 겹칠 때마다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됐다. 렌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든든한 내 편이었다.
더블린에서 집 문제로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런던에 있는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먼저 제안을 했다. 렌이 아내와 함께 창업한 코칭 및 커뮤니케이션 회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뒀지만 런던 스타트업들과 비즈니스가 많아지면서 런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블린에서 일하는 아들이 가끔 방문했기 때문에 방2, 화장실2 짜리 집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리젠트 파크(Regent's Park)와 소호(Soho)에 걸어서 갈 수 있는 피츠로비아(Fitzrovia)에.
더블린에 머무는 게 고역이었던 2019년 3-4월 일주일씩 런던에 가서 렌 집에 머물며 에어비앤비 런던 사무실에서 일했다. 더블린에서 50분이면 런던으로 날아갈 수 있었고(2018년 11월 더블린 거주증을 발급 받자마자 런던 당일치기를 했었다) 런던 팀들과 회의할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였다. 더블린에 사는 렌의 아들 윌(Will)에게서 열쇠를 받고 윌의 방에서 지낸 날들은 행복했다. 렌과 근처 맛집을 가고 쉴 새 없이 수다 떨고.
3주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며 트렁크 생활을 이어갔던 2019년을 버틸 수 있게 건 렌의 도움이 컸다. 아쉽게도 정작 내가 런던으로 옮기자마자 2020년 3월에 렌은 런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집을 구하는 동안 또 한 달 정도를 신세 졌다. 나의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아이유(이지안 역)에게 이선균(박동훈 역)이 있다면 나에겐 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