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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May 24. 2022

런던 사는 맛

반성합니다

I would sweep the floors if I could be in London.(런던에 살 수만 있다면 청소라도 하겠어.)

런던에 오기 전까지 수 년간 하고 다닌 말이다. 짧은 여행을 왔다 돌아갈 날이 다가오면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달라고 하고 싶었고. 그야말로 꿈꾸던 삶을 살고 있지만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갑자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네) 고마운 줄 모르고 어느새 런던 투덜이가 되어 있다.


집 구하는 게 너무 힘들고, 무슨 서비스 하나 받으려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하고, 교통비와 외식비가 심하게 비싸고, 그나마 장바구니 물가는 쌌는데 올해부터는 그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전기세가 폭등했고(너무 심각해 정부 차원에서 주민세를 낮추는 등 방안을 강구하는 수준) 소득세는 진짜 말도 하기 싫다. 여기 갖다 바친 세금이 얼마냐... 청소라도 할 테니 제발 여기 살게만 해달라던 애절함은 어디 갔는지.


사실 좋으면서. 아침 7시에 문 여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Redemption Roasters 야외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가슴이 저릴 정도로 좋다. 평소에 잊고 지내다가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런던에 있다니. 하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날씨 때문에 모든 계획을 취소할 수 있는 거주자라는 게 사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이 삶을 바랐는지 자꾸 잊어버리니까 정신 차리라고 오늘 작정하고 써본다. 런던 사는 즐거움을.


날씨

햇빛에 기분이 좌우되는 나는 지인들에게 You chose the wrong country(나라를 잘못 고른 거 같은데?)라는 말을 듣는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고 겨울엔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영국은 쉽지 않은 곳이다. 캘리포니아 가지 그랬어. 하지만 날 좋은 하루가 수많은 구린 날들을 퉁칠 수 있을 정도로 해를 받으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런던이다.


1~2. 날씨에 따라 이렇게나 다른 풍경 (집 발코니에서)


걷기

샌프란시스코나 (구글 시절) 마운틴뷰로 출장을 가면 우버를 불러 타거나 렌트카를 몰고 다녀서 운동량이 극감한다. It's illegal to walk here(여기선 걷는 게 불법이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를 갈 때도 차를 몰고 다녀오게 돼서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런던은 반대다. 걷기 좋은 도시라 어떤 날은 편도 1시간 거리까지 그냥 걷는다.  


보행자 우선 문화라 차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zebra crossing)에서는 보행자가 있으면 차가 무조건 서게 되어 있어 당연하고, 횡단보도가 없는 골목길에서도 사람이 건너려는 눈치면 서는 차가 대다수다. 차에 치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피해야 하는 한국 거리에 익숙한 나는 차를 먼저 보내려다보니 서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젠 먼저 지나가라는 손짓이나 눈짓에 미소로 답하며 길을 건너는 게 익숙해졌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다. 어렸을 때 설마 나를 치겠어 하는 마음으로 길을 마구 건너 엄마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었는데 영국에서 생긴 버릇이었나 싶다.



공원

런던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장소는 공원. 햇빛이 쨍하고 비치는 날이면 뭐에 씌인 듯 공원을 향한다. 햇살을 받은 초록 잔디와 나무, 파란 하늘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중독자가 되었다.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들어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돗자리 가지고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영국은 개를 풀어놓아도 돼서 개들이 신이 나 휘젓고 다니는데 정말 개 팔자가 상팔자다. 귀여운 개를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곳(샌드위치 먹고 있으면 뺏어먹으려고 하니 잘 지켜야 한다).


3. 햄프스테드 히스, 작년엔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여서 자주 갔다  4. 젊은이들의 놀이터 프림로즈 힐


5. 런던 시내 한복판 그린 파크  6. 공원은 아니지만 킹스크로스를 지나가는 리젠트 운하



카페

런던에 사는 기쁨으로 커피를 빼놓을 수 없다. 화사한 신맛을 좋아하는 나에게 한국 카페에서 주로 쓰는 다크 로스트 커피는 너무나 쓰다. 나같이 커피 체인점을 불호하고 인디펜던트 커피를 찾는 coffee snob에게 런던은 신명나는 곳이다. 호주와 뉴질랜드 커피 문화가 강하게 깔려있어 플랫화이트가 진리.

 

(너무 많지만 최애 카페 몇 곳) 7. Kaffeine.  8. Guillam Coffee House   9. England's Lane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박물관, 미술관을 드나들 수 있고, 웨스트엔드 뮤지컬을 원없이 볼 수 있다. 손흥민 축구 경기를 직관할 수 있고 한국에서는 접하기 힘든 중동 음식, 남미 음식, 아프리카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두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이면 유럽 전역에 닿는다.(정작 아직 런던 살면서 해외 여행을 안 해봤다. 이넘의 코로나.) 런던에 사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정신차렷!


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he is tired of life
런던이 재미없으면 삶이 재미없는 거지(내맘대로 번역)

- 사무엘 존슨(Samual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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