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시간관리 전문가가 되어보자.
전직 직장인 시절, 스마트워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노무법인에 일하면서 근로시간 개선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시간관리'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짧게 일하고 근로시간의 질을 향상해 생산성을 높이는 게 목표였으므로 많은 사례를 접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코로나 19로 돌봄의 손길을 온전히 잃고,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30대 워킹맘.
그래서 시간관리를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생산성 도구로 활용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각 종 책들의 내용은 '시간관리가 나에게 주는 이점'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삶의 가치를 위해 투자하기'위해서는 시간관리를 해야 한다던가.
파레토 법칙과 아이젠하워의 법칙들을 들먹이며 그 이론들을 통해 우리가 시간관리하는데 각성해야 할 이야기라던가.
물론, 저자의 이야기처럼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중요해서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개발서를 찾으면서도 진부하다고 느끼는 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진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이야기도 필연적으로 같은 형식으로 마무리된다.
시간관리의 5가지 법칙을 통해 당신의 골든 타임을 찾아보세요.
그 많은 이야기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단 말이야?
하고 묻는다고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걸...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예시와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책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진부함은 책을 읽다가도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어떤 학자가 했던 실험,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떻고 해서 나열하는 것 말고는 저자의 이야기가 그토록 없단 말인가? 나는 시간관리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좌절했다.
당장의 마중물이 없으니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자기 계발을 하는 엄마들, 그 들 중 나도 한 명이었다. 책이든 유튜브든, 작은 오프라인 강의들도 가릴 것이 없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싶었으나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수많은 정보를 접했다. 그리고 피곤했다.
주어진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피곤함이 배가 되었다. 현재 내 수준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 당장이라도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말들이 카톡으로 오고 갈 때마다 점차 도태되어 가는 것만 같아서 불안해져만 갔다. 카톡방을 나가버릴까 생각했지만, 막상 아예 발길을 끊으면 눈 뜬 장님으로 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카톡방과 온라인 강의에서 접하는 많은 내용들 중에 적용하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몇 가지 손에 꼽는다. 그것들을 하기 위해서 또 시간을 쪼개어 나누었지만 매일매일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감만 느낄 뿐이었다.
실패의 원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시간에는 디폴트 값이 다른 것이었는데 나는 그걸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default : 별도 설정을 하지 않은 초기값
디폴트 값은 기본 값이라는 뜻이다.
나는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두고 있는 초보 엄마였고, 꾸준히는 아니지만 프로젝트성 일을 맡아하는 워킹맘이었다. 더군다나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 난치병을 확진받은 환우이기도 하다. 아이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서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미혼과는 시간의 질과 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만큼 시간을 투자하고,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거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새벽 기상까지 했는데 "왜 아직도 이 상태지?"
나는 열심히 하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왜 하원 하기 전까지 해놓은 게 없지?"
하려고 하는 열정은 가득한데, 심지어 잠자는 시간을 줄여 새벽에 일어나며 노력했는데 결과물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뒤쳐지는 기분만 느껴져서 좌절감이 더 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디폴드 값을
제대로 알 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병'을 가지고 있는 환우이기 때문에 통증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날들이 있는 건 당연한 것이고
새벽 4시 30분에 기상을 하더라도 수시로 잠에서 깨는 아이를 토닥이러 들어가느라 집
중의 흐름이 깨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는데 장애가 생기고, 어려움을 겪고, 다른 사람들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평생을 이 통증을 가지고 가야만 하는 희귀 난치병이라는 판정을 받은 이상,
내 천장관절에 하얗게 염증이 생겨버린 이 상태를 인정하고 (나의 디폴트 값), 나는 아프니까 남들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해라고 인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아프지 않은 날을 만들 수 있을까? (디폴트 재정의)를 고민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매일 한 줄의 인사라도 남기려고 노력하는 카톡방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고, 의지를 북돋는다. 그 속에는 매일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는 분도 있고,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아이 셋을 키우고 책을 쓰는 엄마도 있다. 18년 차 직장인임에도 불구하고 1년에 1권씩 책을 쓰는 분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매일 듣고 자극받다 보니, 그 속에 있는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들보다 더 여유로운 조건과 상황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그들만큼의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걸까. 우르르 쏟아지는 톡들을 보며 부러웠고, 게으른 나 자신을 반성했다.
그러나 나의 디폴드 값을 인정하기로 한 순간부터는 달라졌다.
신입사원들을 모아놓고 연수를 기획하더라도 한 가지 업무를 익히는데 한, 두 달의 시간을 둔다. 그것도 IT기기에 능숙하고 생산성 도구들을 활용할 줄 아는 인재들을 모셔도 그렇다. 본업이 아닌 새로운 일을 배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왜 모르 척하려고 했을까?
왜 나의 속도를 왜 다른 사람들의 기준으로 맞추려고 했을까?
하루를 충만하게 살았다는 느낌은 사실 별게 없었다.
어제의 '나'의 시간보다 오늘의 '나'의 시간에서 조금의 생산성만 높여도 충분하다.
오늘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별일 없이 완수하거나,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하고 집중했던 기록만으로도 하루를 3배로 사는 기분이 든다. 그런 하루가 매일, 이틀, 반복이 되면 그것이 결과물이 될 것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결과물은 시간관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억이 기록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시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를 계획했고, 그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어떤 것들을 놓쳤는지 반성하는 정도로만 그치기로 했다.
나의 초기값을 인정하자는 이야기가 기대치나 목표치를 낮추자는 말이 아니다.
희망을 갖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약점/장애/상황이 되질 않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라면서 자조 섞인 위로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애초부터 나의 상황에서 단기간에 달성할 수 없는 목표들을 잡아두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시간을 죽. 어. 라. 열. 심. 히 계획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나의 디폴트 값을 제대로 아는 것이, 오늘 하루의 계획을 바르게 세우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나의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배분하고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와 총량은 저마다 다르다. 이것이 시간관리를 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한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으로 살고 있으니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육아를 전담하는 돌봄인으로서의 시간관리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시간관리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새로운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시간관리에 대한 글을 쓰고,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는 도구들을 소개하고, 내가 도움받았던 것들을 설명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