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4살 아이 엄마의 혼돈의 기록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쉬운 일이 없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기르는 동안 자아를 잃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들도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을 알아 가고 있다. 여의도 빌딩 숲 사이로 커피 한 잔 들이켜며 한강 바라보는 뻔한 날들도 계속될 거라 생각했지만 사원증을 목에 걸고 분주하게 타자치던 나는 이제 없다. 30살에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난치병 환우가 되어 산정특례 번호가 날라왔을 때, 성당에 가서 기도했다. “도대체 저한테 얼마나 좋은 것을 주시려고, 이름도 무서운 병을 주셨어요?” 계획에도 없는 임신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과분한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나에게만 주신 선물일까. 독한 약을 먹는 동안에는 임신을 할 수 없어서, 난 이미 병원부터 방문해야 했고 피멍이 들도록 배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했고, 우울했고, 슬펐던 날. 내 안의 디폴트 값을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초깃값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꽤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누구보다 솔직하게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그 시절을 공감하며 지금의 힘든 시기를 보낼 누군가에 닿고 싶어서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막상 첫 음절을 쳐내고 나니, 구질구질하고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들을 타자기에서 밀어낸다. 그리고 지금의 안정되고 여유로운 나의 생활을 드러내고 싶어진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욕망 덩어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삶의 면면을 들춰내고 돌이켜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 만큼이나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간은 흐르고 망각이 시계가 돌아간다. 괴로워하던 나를 위해 현대의학의 힘을 빌려도 생기지 않았던 아이가 제 발로 찾아왔고, 임신 중 교통사고로 살아있는 인큐베이터로 지내는 인고의 시간을 또 보냈지만 그마저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 노릇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아직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아이를 낳고 기르던 3년의 시간 동안에는 뚜렷한 경제활동도 하지 못했다. 조리원 동기도 만들지 못할 만큼 소속감과 정체성도 없이 주호의 ‘그로스 매니저(growth mananger)’의 삶을 살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이를 잘 돌보는 엄마도 아니었고, 잘 키우는 엄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객관화된 성과 지표로 인사고과를 평가하는 HR 컨설팅을 하던 나였기에,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평가하는 일에 더 괴로웠다. 각종 육아서에 나오는 엄마로의 역할에 세상이 들이대는 잣대와 기준을 낮춰도 보고 높여도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엄마로 사는 동안에도 짝꿍(남편)과 잡다한 살림살이와 육아 분담을 하는 과정은 작은 것에도 신경전이 일었다. 내 팔뚝만 한 아이를 조금씩 키워내는 일은 그저 유기농 이유식을 먹이고 순면의 보드라운 옷을 입힌다고 저절로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큰다고 말했던 누군가를 찾아낸다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는 어느덧 자라서 4살이 되었고 이제는 유창한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돌봄 노동의 수고로움이 덜어지진 않았다. 자연드림, 한살림을 전전하며 유기농 먹거리를 사다가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돈가스를 먹겠다고 할 때, 집에서 혼자 노는 일상이 걱정돼서 오감발달에 좋다는 물미역을 욕조 위에 뿌려놓고 붙어버린 미역줄기를 하나하나 치워낼 때, 모래놀이를 하겠다고 거실에 모래가루를 던지고 있는 녀석을 볼 때에도 나는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누르고, 감정을 유지해야 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여린 생명을 키워내는 동안 욱하지 않으며 감정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 둘 다 무엇이 올바른 훈육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말이 맞는다고 주장하며 짝꿍과 다퉈야 하는 일, 내 몸과 마음은 비록 돌봄이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노동 현장에 매여있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힘들었다. 하다못해 친정엄마도 ‘자식이 하나뿐인데 그게 얼마나 힘드냐고 앓는 소리를 하냐’ 고 면박을 주니 영아기 자녀를 둔 엄마가 육아와 살림으로 멘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으로 기진맥진하며 지쳐가는 나를 ‘나약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으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럴 땐 ‘위로의 말’을 건네는 육아서 한 권을 끄집어내 읽고 또 읽으며 ‘나와 처지가 같은 그녀가 어떻게 멘탈을 부여잡고 정신 승리를 이루어내었는지’ 깊숙이도 찾아냈다. 그리고 다시 안정감을 찾고 위로받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금도 잘하고 있는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 엄마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앞으로의 나의 근로소득은 앞으로 반비례할 것이라는 자명한 현실 때문이었다. 전문성을 가진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의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업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는 스스로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업무에 몰입할 시간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 프로젝트 단위 컨설팅이 많아 일의 양이 한순간에 몰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가 없던 시절처럼 야근하고 주말에도 여유 있게 데이터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이제는 스킨케어만 한 맨 얼굴, 비벼도 붉어지지 않을 만한 면 재질의 옷, 앉아 일어날 때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축성 충만한 바지. 운동복 입은 아줌마여서는 안될 정도의 모양새만 겨우 갖추며 살아가고 있을 정도로 아이에게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다.
이전과 같은 양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동일한 시간을 투입할 수 없다면, 결과물의 질도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이를 위한 돌봄의 노동은 예측 불가능의 변수가 수시로 일어나고 나는 그것을 해결할 최적의 대안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규칙적으로 일의 양을 가늠할 수 있을 때는 아이돌봄서비스를 몇 시간씩 고정적으로 이용했지만, 당장 다음날 오후에 잡히는 회의 일정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종일반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다. 그마저 대안이었던 어린이집마저도 코로나19로 인해 긴급 보육만 등원하게 되면서 돌봄의 손길을 온전히 잃었다.
엄마로서의 나는 어딘가 속해있지 못하고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렵게 찾아온 내 아이에게 헌신적인 엄마도 되지 못했고, 스스로의 전문성을 키워내며 나를 돌보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경계에서 어물쩡거리며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점차 사라졌다. 시간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나의 역할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의 영역으로 더 나누어져 있을 뿐. 일에 몰입할 시간의 투입량이 적어지는데 이전 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해 낼 자신감마저 점차 사라졌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엄마가 한 둘일까.
경제성을 비교해 보아도 정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일하는 엄마가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게 되면 수반되는 비용들은 지역 카페의 엄마들의 푸념만 읽어보아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아이를 위한 정서적 안정을 생각해서라도, 직접 기르고 부딪히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가성비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내 손에 남는 것이 더 크겠지만 들쭉날쭉한 내 생활패턴에 아이도 나도 어지러울 뿐. 더욱이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척추염이라는 병이 언제 다시 도발할지 알 수 없었고, 아이를 키우는데 일상의 변수라는 건 구구절절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들볶을 필요 없이 내려놓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 지금은 한쪽 발만 걸어두자. 그래도 내가 준비되면 다시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남편이 성실히 잘 벌고 있으니 알뜰살뜰 남들처럼 재테크 하면서 살면 되지. 그렇게 실타래를 풀어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극단적으로 나의 불안감이 터져버린 것은 나날이 오르던 집값 때문이었다. 결혼하면서 여의도 출퇴근을 위해 직행버스가 다니던 교통 좋은 곳에 대형마트가 2개나 위치한 30년 된 구축을 매수했다. 오래된 구축답게 앞뒤 베란다가 광활하게 넓었다. 신혼집이라고 깨끗하게 수리한 후 인테리어를 진행했다. 당시에 2천만 원 들여서 수리를 했는데 28평의 공간에 낡은 집이 새로 태어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와 짝꿍의 명의로 된 첫 번째 집. 하지만 구축답게 매수한 이후로도 늘 제자리인 매매가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친정엄마 도움을 받기 위해 가까운 신축 아파트 전세로 옮겨간 터라 신혼집은 전세를 주었다. 아이와 소통이 가능해지고 다시 업무 전선에 제대로 발을 담근 후남편과 나의 직장 근처로 이사 갈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매매가 상승 중이었다. 세월의 지루함에 시간을 맡긴 채 아이를 기르며 차근차근 목돈을 모아 가려고 했던 그 집은 이젠 꿈꿀 수 없는 가격이었다. 서울에 아파트가 얼마나 많은데, 꼭 그 집에 살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 아쉽지만 내려놓기로 하더라도, 코로나19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동산과 비트코인 광풍 속에서 내 자산을 불려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 일을 생각하자 선득 한 공기가 맴돌았다.
오롯이 짝꿍이 벌어다 주는 근로소득으로 충분히 여유롭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온 코로나 팬데믹은 나에게 자본소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당장 내가 코로나19에 확진이 되어 자가격리에 들어가 돈을 벌 수 없어도, 돈이 나에게 들어오게 해야 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당장 붕어빵을 사 먹지 않아도, 붕어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야 타인의 노동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배웠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 원리도 깨우치지 못한 나를 반성했다. 그저 열심히 자아실현하며 내 일에 만족감을 느끼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경제력 향상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희귀난치병 확진자로 통보받았듯, 그동안 해오던 일들도 어느 순간 찾아온 통증으로 평소처럼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한 아이를 돌보는 일에 몰입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고 당연했던 시간들이 당연시되지 않게 되어버렸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겨울이 오는 것을 대비해 따듯한 집은 준비할 수 있는 것처럼, 어느 날 전 세계에 불어닥친 전염병을 막진 못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평소에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으며 앞으로를 대비해 나가고 있다. 돈 공부를 해야 했다. 돈이 벌리는 원리를 이해하고 깨달아야 했다. 자면서도 돈이 굴러들어오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아이를 돌보는 동안에도 마음의 불안감을 잠시 내려놓고 여유를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쉽게 찾아오는 나약함을 벗어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그리고 돈 공부를 하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자원이 필요했다.
아이 돌봄을 위한 그로스 매니저(growth manager)로 잠시 살기 위해 몇 가지의 프로젝트 업무에만 집중하기로 하고 일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았다. 나는 어중간하게 워킹맘의 자리를 지켜냈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자본주의 공부를 위해 비워두었다. 그렇게 ‘돈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먹은 후에 몇 가지 작은 목표들을 세웠다. 돈 공부를 한다는 것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들 만을 공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에 2천만 원 벌기, 나는 아파트 10채를 샀다, 등의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었다. 돈 공부를 하면서 나도 근로소득이 아닌 자본소득을 일구어 냄으로써 내 안에 남아있는 불안감을 낮추고 앞으로도 갑자기 튀어나올 고통에 초연해지기 위함이었다. 부동산이야말로 물려받은 것 없는 사람이 쌓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라는 점을 애써 적폐 몰이를 하며 부인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는 그 속에서 돈을 벌어 내 아이와 함께할 추억의 터전을 지켜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엄마로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요리하는 시간은 남들보다 곱절은 드는 것 같고, 가사노동엔 전혀 발전이 없었다. 아이에게 매이지 않으면서도 엄마로서의 삶에도 좀 더 만족감이 필요했다. 돈 공부를 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유시간을 또 쪼개야 했다. 남들처럼 4시에 일어나 새벽 기상을 하기도 하고, 짝꿍이 도와주는 날에는 주말에 몰아서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했다. 나는 돈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아내가 되었다가, 근로자가 되었다. 단순한 역할만 나열해도 4가지 몫을 해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컨설팅 했던 ‘스마트워크’ 프로젝트를 스스로에게 도입시켰다. 업무 생산성을 어떻게 높이느냐?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세웠던 수많은 가설과 이론들. 하지만 그것의 근간은 바로 시간관리에 있다. 그것은 조직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거대한 목표보다는 효과적으로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작은 습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돈 공부를 하기 위해 나만의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다.
나는 특히나, 바빠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워킹맘들에게 더 없는 존경의 박수를 보내며 그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내가 만든 시스템을 나누고자 한다. 육아서를 탐독하다가 현실 세계로 돌아와 내 아이에게 적용할 때마다 멘탈이 흔들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고 흉내 내어 보고 비교해보다 보면 자기만의 스케줄 관리를 할 수 있게 될 거라 믿는다.
나만의 시간관리를 통해 스스로 성장했다고 믿고, 시간을 쪼개 꾸준히 해온 돈 공부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그렇다고 아직 아이를 잘 키워낸 엄마도 아니고, 순자산 100억 부자도 아니다. 뚜렷하게 뭘 이루어 냈냐고 묻는다면 특별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지금까지의 순자산이 얼마입니다. 어때요?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저 나만의 시간관리 기록을 옷장 구석에 처박아두는 것은 아쉽고, 수시로 직시하며 글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4살이 된 나의 주호가 훌쩍 컸을 때, 삶의 면면을 기록하며 열심히 살아온 엄마의 기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 시시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주눅이 든 누군가에게도 시간관리가 별게 아니니, 작은 습관부터 만드는 걸 시작해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