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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예 Nov 03. 2023

멸치 똥을 떼고 있던 엄마를 보다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던 늦은 오후였다. 회색 반팔티에 편한 바지 차림의 엄마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거실에 앉아 멸치를 다듬고 있었다. 풀면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머리는 단정하게 하나로 내려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한 마리씩 멸치 똥을 떼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태양빛이 엄마 얼굴에도 조명처럼 드리워져 마치 엄마가 어떤 연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까 6살이나 7살쯤 되었을 거다. 엄마를 빤하게 보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가만히 있다 갑자기 우는 나를 엄마는 놀란 듯 보았던 것 같다. 


"엄마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마치 곧 엄마의 죽음을 앞둔 아이처럼 서럽게 울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갑자기 어린 나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모르겠다. 엄마가 어디 크게 아파서 정말 곧 죽을 사람도 아니었고, 주변에서 누군가 죽는 것을 경험했을 때도 아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언젠가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오는 게 갑자기 두려워졌던 모양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놀랐던 표정이 풀어지고 이내 조금 웃고는 멸치 한 마리를 쥔 채로 멈췄던 엄마의 손이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내가 더 울었던가, 엄마가 나를 불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처럼 찍힌 엄마의 모습과 내가 한 말만 또렷하게 기억이 날뿐이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내 젊음을 즐기고 누리는데 정신이 팔려서, 엄마의 시간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엄마는 언제나 든든하고 건강한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처럼, 언제라도 그 자리에 있어 줄 사람이니까 조금 무심히 굴어도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대했다. 그러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유한한 우리의 시간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음이 점점 선명해지는 지금,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슬프게도, 무섭게도, 아쉽게도 느껴진다. 


  나이를 한 살 먹을 때마다 엄마가 나를 키우며 들였을 정성과 사랑이 실감 나 감사하고 애틋하다. 엄마가 나와 함께 있어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얼마가 남았든 영원하지는 않을 그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시간이 흘러서 나도 이제 더 이상 유치원생 꼬마가 아닌데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엄마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사냐고 엉엉 울던 꼬마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나 보다. 흔하디 흔한 말이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있을 때 잘하자'를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추워지기 전에 엄마랑 가까운 데 드라이브라도 다녀와야겠다. 


사진: UnsplashAlejandro Ort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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