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밭을 보려다 산성을 걷게 된 건에 대하여
목적을 잃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가도 괜찮다
청명한 가을이다.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 귀한 날씨가 이어지니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게 아쉬울 정도다. 추워지기 전에 나들이라도 한 번 가야겠다 싶던 차에, 남편이 갑작스러운 여행 제안을 해왔다. 언젠가 보성 녹차밭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는 내일 당장 보성으로 떠나자는 제안이었다.
번개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평소의 나였다면 다음으로 미뤄 계획을 세워보자고 했겠지만, 그날따라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미루고 미루다 보면 언제 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과 갑자기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신혼생활의 묘미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지도를 보니 보성은 거의 남쪽 땅끝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예상 소요시간은 5시간.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2시쯤 도착하면 점심을 먹고, 녹차밭에서 사진도 찍고, 녹차 아이스크림도 먹어보고 저녁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차로 왕복 10시간의 당일치기 여행은 내게 큰 맘먹고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가겠다고 결정을 하고 나니 내심 기대도 되었다.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에 귀신같이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혹시 일기예보가 바뀌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쾌청한 날씨를 가리키는 해님 표시에 안심하며 여행 갈 채비를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녹차밭에서 예쁜 사진을 남기고, 뭔가 다르다는 보성의 녹차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설레기만 했다.
그런데 도로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날씨가 워낙 좋은 데다가, 찾아보니 이곳저곳에서 지역축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도착예정시간은 점점 늘어 오후 2시가 넘어갔다. 소요시간 5시간도 큰 맘먹고 간 것이었는데, 이대로라면 7시간 넘게 차 안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착 예정시간이 조금씩이라도 줄거나 멈춰있기라도 했다면 계속 고! 를 외쳤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야금야금 도착 예정시간은 계속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손절 타이밍을 재야 했다. 이대로라면 쫄쫄 굶은 채로 보성에 도착해, 다 지친 상태로 녹차밭에 입성할 터였다. 남편이 내가 언젠가 보성에 가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듯이, 나 또한 남편이 언젠가 공주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급히 '공주 당일치기'를 검색했고, 운전하고 있는 남편에게 공주의 유명 맛집과 당일 여행 코스를 죽 읊어주며 공주로 목적지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목적지는 보성 녹차밭에서 공주 공산성 근처의 유명식당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예상소요시간도 4시간에서 1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미 차 안에서 3시간을 넘게 보낸 때였다. 1시간만 더 있으면 차 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생각지도 못하게 공주에 도착해서 즐긴 하루짜리 여행은 아쉬울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급히 찾은 맛집도 성공적이었고, 공산성 산책은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공주에 도착한 순간부터 녹차밭은 떠오르지 않았다. 공산성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본 공주시내와 금강의 전경으로 이미 더할 나위 없는 하루가 채워지고 있었다.
보성 녹차밭이 아니라 공주 공산성으로 여행의 장소가 바뀌었지만, 가을을 즐기고자 했던 여행의 목적은 완벽히 달성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킥킥대며 하루의 여정을 나누면서, 어쩌면 원래 가려던 곳을 가지 못하고 새로운 여행지에 가게 된 것이 우리의 하루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원래 가려고 한 곳까지의 여정이 너무 힘들다면 때로는 멈춰서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애초의 목적만 잃지 않는다면, 가던 길에서 잠시 멈춰 선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시작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끈기 있게 처음 결정한 길을 따라 나아가겠다는 결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처음 설정한 도착지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도 험난해서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쓰러질 것 같다면, 잠시 멈춰 서서 새로운 길이 있는지 고개를 돌려 살펴보자. 애초에 출발하면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과 본질만 놓치지 않는다면, 새롭게 찾은 도착지에서 예상외로 멋진 결과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