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경험
학교 일로 한 번의 공황증상을 경험한 이후로 계속 멜랑꼴리 한 기분이 마음 깊은 곳에 이어지고 있었다. 개별적인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한창 마음이 힘들 때보다는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찝찝함과 초조함, 멜랑꼴리 한 기분을 털어내고 싶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이 그 첫 번째 상담날이었다. 상담선생님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내줄까, 내 머릿속이 어떻게 정리될까, 어떤 신박한 질문이 내 뒤통수를 때릴까, 상담선생님은 나를 얼마나 이해할까, 와 같은 다양한 기대를 품으며 기다리던 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쾌한 경험을 하고 왔다. 약속한 상담시간은 5시였는데, 앞 상담이 끝나지 않았다며 10분가량 상담 시작이 연기되었다. 10분 정도 기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첫인상에서부터 신뢰도가 조금 깎인 상태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데다가 첫 회기 상담을 맡은 상담자는 내가 요청한 상담자가 아니었다. 상담을 신청할 때 그 센터에 근무하는 상담자 이력을 확인하고 원하는 상담자 배정을 요구해 놓은 터였다. 갸우뚱했지만 접수상담이라 다른 분이 하시는 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상담이 이어졌다.
상담 신청 시에 작성한 접수면접지를 읽어보았다며 포문을 연 상담자는 내가 적은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 접수면접지를 읽으신 게 맞나요?"라고 물었고, 상담자는 당황한 듯 "엑셀파일에 그렇게 적혀있던데..."라고 답했다. 아마 상담자 배정을 하면서 뭔가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상담자 손에 내가 작성한 접수면접지가 들려있는 상황이었다. 뭔가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 즉시 뭔가 착오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잠시 접수면접지를 읽고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이 상담자를 조금은 신뢰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상담자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불쾌감이 스멀스멀 생기는 와중에 상담자는 내가 온 이유는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내 문제를 정형화하더니, 문제해결 방법까지 첫 상담에 모두 결론 냈다. 나를 만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타자가 나에 대해 이렇게나 빠르게 결론을 내다니, 엄청난 능력인 건가.
내담자 입장에서 이건 불쾌했다. 내 말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나에게 돌려주었고, 상담자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해서 다시 말하면 마치 그 문제에 고착된 사람인 것처럼 몰아갔다. 내가 힘들었던 것을 담담히 말하면 상담자는 그것을 과장해서 반영했다. 심지어 내담자인 나보다 상담자가 더 말을 많이 했는데, 상담자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내가 더 많이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내가 상담료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담자의 말이 길어지다 보니,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도 애를 써야 했다.
결국 상담자가 마지막에 한 말은 "내담자님의 마음가짐을 좀 바꿔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가 상담 신청 이유로 적은 것은 지금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복잡하니 이것들을 좀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마음가짐을 바꾸라니... 상담자가 내 문제를 마음대로 정의하더니, 마음대로 해결책까지 내놨다. 기대에 못 미친 상담에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시계만 쳐다봤다.
분명 50분이 한참 지났는데, 상담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는 듯 상담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음 상담이 없으셔서 이런가 했는데, 곧 상담자 핸드폰으로 다음 내담자가 20분째 기다리고 있으니 마무리를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나와의 상담 중에 상담자가 갑자기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는 상황이 황당하면서, 내 상담시간에 10분 늦은 게 어쩌다 생긴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관리를 하지 못하는 상담자였다.
그리고 거슬렸던 상담자의 태도 중에 하나가 입술각질을 뜯으면서 내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립스틱 바를 때 '에'하는 입모양을 하고 한 손으로 입술각질을 뜯으며 "응, 응"이라고 반응하면서 말이다. 네일아트를 하러 가도 그것보다는 성의 있게 들어주겠다 싶었다. 손동작도 많아서 본인이 이야기할 때 웅변을 하듯 손을 휘저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마치 자신의 말이 맞음을 자기 스스로에게도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상담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내 생각을 묻는 질문에 상담자가 넘겨짚어 이야기한 부분을 바로 잡아 다시 이야기를 하자, 상담자는 또다시 자신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50분이 넘는 상담시간 동안 한 순간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상담이 끝나니 불쾌감에 심장이 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와 성의 없이 입술을 뜯으며 이야기를 듣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상담이 끝나고 나는 곧 그 센터 담당자와 통화해서 상담자를 교체를 요청했다. 상담자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황에 그 상담자와 상담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감히 내가 지금껏 해본 상담 중에는 최악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모든 경험에는 배움이 있다고, 한 번 더 마음에 새기게 된 것은 있다. 첫째, 복장은 상담자의 전문성과 신뢰감을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노출이 있는 복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상담시간에 화자는 내담자다. 상담자는 되도록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 사소한 태도가 상담자의 신뢰를 잃게 할 수 있다. 넷째, 상담시간을 관리하는 것도 상담자의 역량이며 내담자에 대한 예의다. 다섯째, 상담자의 차분한 말투와 어조는 상담자와의 신뢰관계 형성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섯째, 내담자의 문제를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일곱 번째, 상담자는 내담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돕는 사람이지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심리상담 비용이 한 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떤 상담자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미지의 첫 상담은 돈을 버릴 수도 있다는 각오로 가야 하는 것일까. 오늘 받은 상담은 비용을 지원받을 기회가 있어서 내 돈 내고 한 게 아니었지만, 만약 내 돈 내고 받은 거였으면 환불이라도 요청을 해야 할 판이었다. 오늘 내가 만난 상담자 같은 사람과 생애 첫 상담을 한 내담자는 어떡하나. 나야 그동안 좋은 상담자도 만나봤으니 상담자를 교체해서라도 상담을 더 받겠다는 생각이지만, 만약 생애 첫 상담이 오늘 내가 한 상담과 같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상담실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좋은 상담자와의 상담은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간인데, 한 번에 좋은 상담자 찾기가 쉽지 않다. 다음 주에 만나게 될 새로운 상담선생님은 부디 믿을만한 분이기를 소망한다. 이 글을 쓰면서 덩달아 학교 상담실에서 만나고 있는 아이들 생각이 난다. 그 아이들에게 내가 최고의 상담선생님은 아니더라도 최악의 상담선생님으로는 기억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태도는 지켜가며 아이들을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