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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짧은 '플링(fling)'이었다랄까

세르비아에서 보낸 12월 25일 with petar

by 김혜미
나도 '플링(fling)'이었을까

최근 김신회 작가님의 '아무튼, 여름'을 읽다가 완전 나를 서술하는 대목을 찾았다. '플링(fling), 여름 한철 사랑하는 거, 휴가지에서 하는 짧은 연애 같은 거' 매력적인 단어로 느껴졌다. 잠시 생각했다. '피터와 나는 플링 관계였을까? 내가 느꼈던 감정이 플링이었을까? 그에겐 내가 그냥 좋은 사람, 친구였을까?' 아직까지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나는 이에 대한 답을 맺기 참 어렵다. 아무튼, 우리가 처음 만난 한 겨울, 그해 크리스마스는 서로에게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우린 함께 베오그라드 여행자

둘 다 배가 고픈 상황이었던 터라 바로 식당에 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자연스레 난 피터를 따라갈 준비를 하고 피터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린 ~~ 로 갈 거야, 거기에 이게 맛있거든!" 하며 식당을 소개해 줄 거라는 등 말이다. 웬걸, 베오그라드는 나뿐만 아니라 피터에게도 낯선 곳이었다. 그때 안 사실은 날 보기 위해서 6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베오그라드로 올라왔던 거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것보다 더한 긴 여행이었다. 거리가 많이 멀다 보니 지금까지 수도에 온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며, "어디 갈까?"라고 해맑게 물어보는 모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이 상황이 재미있었다. 피터가 길치라는 건 이미 수많은 대화를 통해서 알고 있었기에, 바로 구글 지도를 켜서 '세르비아 음식점' 중 가장 로컬 음식을 파는 것 같은 식당을 골라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과 세르비아에 도착한 지 24시간도 안 된 내가 세르비아인을 이끌며 식당을 찾아가고 있었다. 둘 다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기에 이동하면서 '내가 세르비아에 살던 사람이고 네가 여행자 같다.'는 말을 깔깔 웃으며 몇 번이고 주고받았다. 그 순간이 피터에게도 처음이라, 오히려 좋았다. 주변의 것들에 같이 신기해하고, 함께 궁금해하며 베오그라드 골목골목을 여행할 수 있었으니깐. 솔직히 평생을 봐왔던 나의 동네를 외국인에게 소개해줄 때,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것들에 감탄하는 걸 쉽게 공감하지 못할 거 같다. 이미 나에겐 평범한 삶이었기에. 그러나 우린 같은 베오그라드 여행자였던 덕분에, 행복이 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피터가 방금 진짜 유명한 연예인이 지나갔다, 저 빵 집에 배우가 있다 등 말을 해 주며 신기해했다. 그 들뜬 피터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유명한 연예인인데 주변 사람들이 가서 사진 찍어달라거나, 주변에 몰리거나 하는 장면이 펼쳐지지 않아서 또 새로웠다. 세르비아 연예인도 두 명이나 보고, 같이 길도 헤매 보고, 무단횡단도 해보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내가 찾은 세르비아 로컬 음식점, '체바피' 파는 곳. 급하게 찾은 식당인 것 치고는 꽤 사람도 많았고, 큰 트리와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아담하고 포근한 식당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우릴 위한 확 트인 창가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컬 음식인 체바피고 뭐고, 자리에 앉아서 피터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앉으니까 또다시 아까의 첫 만남 때의 두근거림 때문에 광대랑 입꼬리가 씰룩씰룩 춤을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화상으로 만날 때는 늘 시간제한이 있어서 대화를 못 다하고 끊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아쉬워할 겨를 없이 핑퐁핑퐁 대화를 이어나갔고, 서로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이전 여행지에서 뭐 했는지, 한국, 진로, 내가 온다 했을 때 기분과 지금 기분, 연말 계획, 가족 이야기 등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를 몇 년 만에 만난 것 같았다랄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우리의 모습은 한결같은데, 다만 그 긴 공백 동안 서로 지내온 환경이 달라 그간 쌓아둔 이야기를 서로 풀어보는 시간 같았다. 다행이다, 피터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라서.


우리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로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쯤, 체바피가 등장했다. 체바피는 얇은 빵에다가 양파, 돼지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원하는 대로 추가해서, 마요네즈 등 소스와 같이 먹는 세르비아 대표 음식이다. 개인적으로 햄버거를 먹는 기분이었다. 맛이 뭐가 중요할까, 이 순간이 맛있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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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와 데이트, Merry Christmas!

맛있는 순간을 먹은 후, 역시나 내가 찾은 카페로 찾아갔다. 처음에 피터가 안다는 카페에 갔을 때는 좀 충격을 먹었지만, 내색하지 않기에 성공했다. 순수한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으며 넘겼다. 글쎄, 큰 백화점 안에 있는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점을 데려가는 게 아닌가! 난 별스타 감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지인들의 핫플레이스 카페 분위기가 궁금했다. 한국에서는 프랜차이즈보다 특색 있는 카페들이 많아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후자의 카페에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거다. 인식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에 약간 놀랐다.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인데 커피보다 분위기를 우선시 여기고 있었다니. 작은 깨달음을 깨우쳐 준 피터에게 고마움을, 이건 이렇고 다행히도 처음 도착한 카페에 자리가 다 차있어서 백화점 내에 있는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대신, 원하던 현지인들의 감성 카페를 찾아갔고, 아늑한 공간에서 피터와 또다시 밀린 대화를 수없이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사실, 카페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히 설레고, 재밌고, 신기하고, 행복해했는데 우리의 대화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증발한 대화를 뒤로 하고, 세르비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러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쯤 될 듯한 베오그라드 중심가로 향했다. 솔직히 말해서, 크리스마스는 이전 부다페스트에서 7일 동안 한없이 즐겼기 때문에 이곳에서 아무리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거리가 꾸며져 있다 하더라도, 감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심지라서 굉장히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피터도 나도, 금세 시끄러운 분위기에 지쳐버려서 점점 얼굴에 에너지가 빠지는 게 티가 났다. 이 모습마저도 비슷한 우리가 신기했다.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만 구경하고 내일 다시 만나서 놀자는 말을 주고받고, 가벼운 포옹 후 헤어졌다. 지금 헤어져도, 내일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 덕분에 아쉽지 않게 하루를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날 하루는 우리의 짧은 플링(fling)이었다랄까,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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