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에서 보낸 12월 25일 #2
Rice dish 찾으러
나의 크리스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365일 중 하루일 뿐인데 왜 그렇게 들뜨게 하는 존재인지, 참 그 매력을 피하기 어렵다. 기념일을 진심으로 대하는 나로서, 스물세 번째로 주어진 크리스마스가 자정을 넘길 때까지 알뜰하게 쓰고 싶었다. 피터와 헤어지고 나서, 북적거리는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남은 6시간, 어떻게 보낼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뚜벅뚜벅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그리고 일주일 넘게 제대로 된 쌀밥을 먹지 못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밥순이인 내가 밥을 안 먹고 버텼다니, 대단하다.' 잠깐 걷던 두 다리를 멈추고, 밥집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원하는 한식집이나 밥을 파는 매장을 찾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친숙한 밥알이 보이는 메뉴 사진이 걸린 태국 음식점을 발견해 바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나를 위한 아담한 창가 자리가 한편에 마련되어 있었고, 곧장 메뉴판을 펼쳐 'rice'를 찾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역시 아시아는 통하는 건가, 'Rice dishes'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시키고 싶었지만, 잠시 쌀을 만나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 카레를 시켰다. 메뉴 주문하기의 큰 일을 끝낸 후,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연말이구나.' 비록, 그들을 등진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 소리에 왠지 모를 편안함과 따스함을 느꼈다. 영어가 아닌 세르비아어라서 그런지, 더욱 알아듣지 못하니 좋았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거칠게 느껴졌던 세르비아어에 당황스러워했으면서도.
타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asmr
언제 한번, 왜 나는 낯선 타국에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이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일까? 에 대해 아는 언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언니는 '일종의 asmr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흔히 아는 'ASMR, 마음을 안정시키는 소리' 말이다. 뒤이어 "한국에서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까지 나도 모르게 들고 있을 때가 있잖아, 그런데 외국에 있으면 남이 하는 소리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덕분에 편암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라는 나의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알려주었다. 맞다, 난 외국에서 asmr을 즐기고 있던 거다.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의 짜증 났던 이야기, 이랬네 저랬네 하는 소리, 연인들의 다툼과 화해의 반복 등 다양한 소리를 듣고 맞이한다. 분명히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한국인이라서, 한국어니까, 나의 귀가 무조건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바로 뻗어버리는 게. 아무튼, 외국을 나가면 타인의 대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응은 사라진다. 대신에, 오로지 나의 감각에 집중하게 된다.
'눈', '와, 저기 너무 예쁘다.'
'발', '저기로 가볼까'
'맛', '이거 진짜 맛있네, 씹을수록 맛있어.'
'소리',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 소리는 나에겐 asmr' 모든 주체가 나, 스스로이니 편안할 수밖에. 언니 덕분에, 여행 덕분에, 여행하면서 얻는 편안함의 근원 중 하나를 깨달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따뜻한 연말 세르비아 ver. asmr을 들으면서 카레 비슷한 쌀밥을 먹으며 크리스마스 만찬의 시간을 나 홀로 보냈다. 쌀알이 우수수 떨어지는 밥일지라도, 소스가 약간 많이 짰음에도, 오랜만에 밥을 만나서 행복했다. 그리고 스물세 번째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아름답게 연고 없는 나라에서 혼자 멋지게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았다.
근사한 만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발길이 닿는 대로 여기저기 또 들렸다. 먼저 목에서 불타오르는 카레향과 짭짤한 염분을 수분과 함께 내보내기 위해, 'luff'에서 망고 젤라또 하나를 시켰다.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는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귀여운 두 아이들과 함께 젤라또를 먹으며 눈으로 몇 번 대화를 주고받고 나왔다. 또 내 발길이 멈춘 곳은 외관부터 달콤함이 묻어져 있는 한 베이커리 집, 크리스마스에 맞게 빵들이 귀엽게 데코 되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빵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절대 내 돈 주고 사 먹을 빵이 아니었지만, 내일 만날 피터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 하나 고르기로 했다. 나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옆에서 나처럼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려고 고민하는 듯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고르기 너무 어렵지?" 그 작은 빵들 앞에서 다 큰 성인 두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건드리며, 고민하는 모습이 웃겼다. 고민 끝에, 난 크리스마스니까 트리 장식의 빵을 포장해갔고, 잠시 대화 나눈 사람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고, 따뜻한 마음이 두 배가 되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중간에 비닐봉지가 터져서 데굴데굴 굴러갔던 귤 다섯 개와 요거트를 사들고 숙소에 들어가서 꿈만 같았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안 그래도 따뜻한 마음인데, 따뜻한 차와 함께 말이다.
"나의 스무세 번째, 크리스마스 진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