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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등딱지를 가진
낯선 거북이의 등장

빙판에서 함께 만드는 원, 나의 두 번째 스케이트

by 김혜미
재빠른 토끼들 사이에서 핑크색 등딱지를 가진 낯선 거북이가 등장했고,
빙글빙글 빙판에서 서로 어울려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Lana 덕분에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NoviSad 지역도 여행했다. 개인적으로, 노비사드에서 보낸 짧은 나날들이 5일 동안 지냈던 베오그라드보다 훨씬 편안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나의 정서와 맞는 나라, 지역이 어디인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아, 내가 이런 곳을 좋아하는구나.', '나랑 여기가 잘 맞는구나.' 내 정서와 맞는 지역의 공통점들을 찾아보면 다 특별할 게 없는 일상생활인데 특별함을 느낀다. 차분한데 가끔은 활기찬, 사람들이 좋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이런 곳은 왜 항상 나라를 이동해야 할 때마다 찾게 되는 건지, 모든 여행의 공통적인 관례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세르비아?' 하면 '노비사드'를 떠올릴 수 있어서 만족한다.


l이 "노비사드에 오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어봤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 스케이트 타러 가고 싶어!"라고 답했다. 비록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부다페스트에서 펭귄 보조 기구와 두 꼬마 선생님과 함께한 게 다이지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스케이트를 다시 한번 타보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자마자 가볍게 수프를 먹고, 바로 동네 스케이트장으로 이동해 소원 성취를 했다. 다 같이 6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우르르 빙판으로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평소 한국에서도 오픈 컷을 잘 안 하는데 스케이트장 오픈 컷을 해 보다니 이 자체만으로도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다들 빙판으로 달려 나가고 있을 때, 난 겸손하게 가장자리에 있는 생명 줄에 매달려 있었다. l은 걱정 말라며 잡아줄 테니까 타보자면서 손을 잡아주었고, 천천히 발을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몇 바퀴 함께 달렸을까, 어느 정도 빙판 위를 밀며 나아가는 느낌이 뭔지 알 거 같아서 "나 한 번 혼자 타볼게!" 하고 손을 놓았다. 몇 번 비틀비틀거리면서 넘어지다 보니까, 이제 스스로 일어나는 법도, 어떻게 발을 움직여야 하는 지도 차츰 깨달았다. 아픔을 모르는 건지,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그 순간을 즐겼던 건지, 넘어질 때마다 '원, 투, 쓰리.....텐' 숫자를 세며 해맑게 l을 쳐다보았다. l은 넘어질 때마다 잘했다고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 '나, 잘한 거 맞아?' 끝까지 옆에서 도와준 l과 넘어지는 용기 덕분에, 이제 빙판 위를 조금은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l이 말을 건다거나, 누군가가 내 옆을 쌩쌩 달려 나간다거나, 부딪힐 거 같으면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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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스케이트


그날 노비사드 스케이트장에는 재빠른 토끼들 사이에서 핑크색 등딱지를 가진 낯선 거북이가 등장했고, 빙글빙글 돌며 한 빙판 위에서 서로 어울려 원을 그리고 있었다. 거북이가 아무리 느려도, 몇 번이고 혼자 넘어져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스케이팅에 집중하고 있을 뿐, '모두에게 처음이 있다.'는 부다페스트 아저씨의 말씀처럼, 그들 모두 처음이 있었기에 속 터지도록 느린 거북이를 보아도 웃으며 넘어가 주었던 게 아닐까. 다음에 나도, 어느 분야에서든 '처음'을 만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또, 도움을 건네줄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친절함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지.

KakaoTalk_20220803_083355870.jpg 너희들 덕분이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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