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거닐었다.
파스텔 색감의 주택가, 숨은 창문 그림 찾기
노비사드가 주는 느낌은 이전에 여행했던 베오그라드와 사뭇 달랐다. 확실히 수도에서 벗어났음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노비사드에는 트램이 다니지 않는다. 유독 삐그덕 거리는 쇳소리가 심한 베오그라드 트램들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차분하게 교통정리가 잘 되고 있었다. 잠시 주변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니,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따뜻한 색감의 건물들의 외벽 덕분에 마음 한편이 절로 몽글몽글거렸다. 아주 잠깐 런던의 노팅힐이 떠올랐다. 당시 영화 촬영지 따라다니는 여행에 푹 빠져있어서, 런던 떠나기 전에 급하게 일부러 관련 영화들을 찾아봤다. 그중에 하나, '노팅힐' 영화를 보고 나서 직접 그 거리를 거닐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연두색, 노란색, 핑크색, 하늘색 등 형형색색의 주택들이 이루어진 마을을 보면서 귀여움과 몽글몽글함을 느꼈다.
그리고 비슷한 노팅힐과 노비사드 동네에서 다른 점을 딱 하나 발견했다. 노비사드는 산뜻한 파스텔 집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귀여움이 담긴 귀여운 창문 벽화들이 곳곳에서 반겨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평범한 가정집들의 창문에 어린아이들이 그려놓은 듯한 창문 아트가 눈에 띄었다. 어느새 보니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숨은 가정집 창문 그림 찾기'를 나 홀로 즐기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 아래 초록색 모자를 쓴 귀여운 눈사람, 나를 환영한다는 듯한 온화한 웃음을 가진 산타클로스 덕분에, 아침부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동네가 귀여운 걸까, 아니면 노비사드에 사는 사람들이 순수한 동심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후자 덕분에 몽글몽글한 동네가 탄생한 거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난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난 몽글몽글한 지역을 좋아하는구나,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감의 주택들이 들어선 마을과 차분한 골목골목이 줄지어 있는 그런 곳.'
한없이, 거닐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오랜만에 만난 골목을 신나게 두발로 걸어 다니다가, 미리 구글로 찾아놓은 식당에 찾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쌀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는 메뉴가 있으면 무조건 "yes"였다. 점점 밀가루에 지치기 시작했는지, 밤마다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아시아 식당이 어디인지 간절하게 찾다 잠들었다. 아쉽게도 근처에 아시아 식당은 없었지만 평점이 꽤 괜찮은 곳에 헝가리 음식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헝가리에서도 한 번 밖에 안 먹었던 굴라쉬를 먹기 위해 이 식당('Lazin Salas')을 골랐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 할 줄 알았는데, 입구에 들어서니 첫 손님이 되어 있었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에서 열심히 찾던 인테리어 맛집이라는 개념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식당에서 '와, 여긴 진짜 인테리어 맛집이다.'라며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식당 내부에 맞춰 나 역시도, 부푼 소매에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옷을 입어야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후드티와 레깅스 차림의 눈꺼풀만 급하게 떼고 나온 주민이 되어가는 여행자였다. '다음엔 한 번 꼭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코르셋 원피스를 입고 와 봐야지.' 얼마 되지 않아 여행 중인 듯한 한 가족이 들어와 가볍게 술을 곁들여 마시면서 잔잔하게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얼핏 들었을 때, 세르비아에서 파는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며, '이 술은 코로나를 이긴다.'라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농담 소리와 곁들어, 라디오 듣듯이 속으로 반응하며 굴라쉬를 음미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음미하려고 노력했지만 화끈하고 자극적인 맛에 못 이겨 얼른 음식을 장속으로 욱여넣는 흡입에 가까웠다. 결국 많이 남기고 말았지만 약간의 쌀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에 만족하며 화장실까지 귀여웠던 식당에서 나와 다시 동네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나, 요즘 서점이 그리웠네
걷다가 조금이라도 눈길이 가면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여긴 물가도 싸니까 옷도 싸겠는데?' 하며 들어갔던 옷가게에서 해리포터 잠옷과 슬리퍼에 잠깐 마음을 기울였다가 별반 다를 거 없는 가격에 다시 나왔고, 환전소가 있길래 남은 디나르를 유로로 바꿨고, 한적한 크리스마스 마켓도 거닐며 구경해보고, 잠시 사진도 찍다 보니 어느새 난 돌고 돌아 동네 서점에 와 있었다. '맞네, 나 요즘 서점이 그리웠네.'
서점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동안 책방과 책 냄새, 그 특유의 분위기가 그리웠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으로 따지면 약간 영풍문고, 교보문고 비슷한 대형 서점이었다. 평소 한국에서도 약속이 생겨서 어딜 나간다면 약속 장소에 가기 1시간 전에는 미리 나가서 그 동네 독립서점을 찾아가곤 한다. 되도록이면 인터넷 서점보다는 서점에서 가서 책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쥐며 책장을 넘기는 것을, 대형서점보다는 독립서점을 좋아한다. 정신없이 여행을 즐기다 보니까 책방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이 빠져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서점 안에서 그동안 못 가졌던 책과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은 곳곳에 엽서, 굿즈 등이 여러 개 팔고 있었다. 원래 대형 서점에서 이런 굿즈는 비싸서 잘 안 사는데 계속해서 눈이 갔던 '미니 지구본'은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들었다 내려놨다를 반복하면서, 한국에 가서 내가 얼마나 이 지구본을 들여다볼까를 그려보며, 결국 몇 바퀴를 돌고 돌아와서 처음에 집었던 갈색의 미니 지구본을 내 품속에 챙겨 왔다. 그때 낸 만원 덕분에 지금까지 내 책상 한편에 놓인 지구본을 볼 때마다, 흐뭇해하며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행복을 느낀다. '사 오길 잘했어.' 2층은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정말 한적하고 좋았다. 특히 크리스마스 트리, 옆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 집이 인상적이었다. 눈길이 가는 원서 몇 권을 들춰보았다가 최근에 봤던 브리저튼 시리즈가 원서로 나와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고, 잠시 레이디 휘슬다운의 목소리를 듣다가 '얘도 사갈까?' 하는 생각이 스칠 때쯤 책을 내려놓고, 천천히 서점 밖으로 나왔다. '이제 커피 한 잔 마시러 갈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