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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 한 그릇이 알려준 깨달음

'나를 위한 휴식'이 필요했네

by 김혜미
쌀국수 한 그릇, 흰 밥, 만두, 제로 콜라, 간편죽 등등


그럴 때는 근처 아시아 음식점 찾아서 뜨끈한 쌀국수 한 그릇 먹고,
숙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봐.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너무 아까워.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숙소 인셉션에 가서 호스트에게 체온계가 있는지 물어보며 아침을 시작했다. "혹시 숙소에 써마머터(thermometer)있어..?" "원래 있었는데 고장 나서 지금은 없어, 나중에 구하면 알려줄게." 지금 당장 내 상태를 확인해보고 다시 잠에 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매우 찝찝하게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분명히 숙소의 히터는 아주 잘 나오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온몸에는 식은땀이 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설마 이 증상이 뉴스로만 접해왔던 코로나 증상인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로, 일단 무거운 몸 이끌고 캐리어 앞으로 가서 깊숙이 넣어두었던 옷들을 다 꺼내는 작업을 했다. 우선 경량 패딩부터 시작해서, 히트텍과 수면양말, 두꺼운 목티 등 하나씩 꺼내 그대로 온몸에 장착했다. 그리고 몸 안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 나의 노력은 터무니없었다. 제대로 먹을 힘도, 움직일 힘 조차도 없어 순간 침대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멍했다. 괜히 목도 아픈 거 같고 그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무의식적으로 나의 손가락은 한국행 티켓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티켓을 취소하고 얼른 한국에 갈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이 해외에서 혼자 아프면 이렇게 나약해질 수 있구나를. 그러다 우연히 연락이 닿았던 친한 오빠가 이성적이지 않은 나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정신 차리게끔 도와주었다. "그럴 때는 근처 아시아 음식점 찾아서 뜨끈한 국물 있는, 쌀국수 같은 거 먹고 돌아와서 숙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봐.", "지금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너무 아깝다."


오빠는 가볍게 던져준 말일지 몰라도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고, 덕분에 이성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내 눈길은 한국행 티켓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근처 아시아 음식점을 검색했다. 최대한 밥이나 쌀국수 메뉴가 있는 곳을 기대하면서. 아쉽게도 숙소 주변은 아니었지만 환승 없이 트램을 타고 갈 수 있는 근사한 쌀국수 음식점을 찾았다. '그래! 이번에는 이왕 먹는 거 제대로 식당에 찾아가서 맛있는 음식 먹고 에너지 충전하자!' 평소 같았으면 혼자 다닐 때는 걷다가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기 일수였을 테이지만 이번에는 몸이 아팠으니 나를 위해서 평도 좋고, 맛도 좋은 식당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몸에 힘이 없어졌다는 걸 걷고 있는 나의 두 발만 잠시 보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쌀국수를 먹고 나면 그나마 나아질 거라는 조금의 희망만 바라보고 꾹 참으며 숙소 밖으로 드디어 나왔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정오를 넘어 밖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여행 중 유일하게 정오를 훌쩍 넘긴 브레이크 타임에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안내방송과 노선표를 알 수 없는 빨간 트램을 타고 이동했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아무런 지표도 없었지만 대충 구글 지도에서 알려주는 식당 주변 도로에 도착했을 즈음 그냥 문 앞에 서있었고, 다행히 잘 내려주었다. 결론적으로 아주 올바르게 잘 내렸고, 그 와중에도 잘 찾아다니는 스스로의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웃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베오그라드 하늘 아래에서 나 홀로 아픈 몸을 이끌고 걷다 보니 겉모습부터 아주 멋스러운 'Restoran ISTOK'을 발견했다.


메뉴판을 넘길 때마다 익숙한 쌀국수, 만두, 제로콜라에 흰 밥을 사단콤보로 맞이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아직 쌀국수를 먹지도 않았는데 간판에서부터 따뜻함이 느껴졌고, 내부는 더욱 따뜻했다. 얼른 국물 한 그릇으로 내 몸 안도 따뜻한 기가 돌아 혈액이 잘 순환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깊숙이 내부로 들어가 4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았다. 이곳은 회전율이 빠른 편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이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메뉴판을 넘기자마자 등장한 쌀국수에 이어서 만두, 제로콜라에 흰 밥까지 준비된 사단콤보를 맞아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주저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시켰다. "음,, 우선 One Pho bo and steamed dumplings.. and ah! one rice, zero coke."


이날, 타이밍이 참 신기하게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말 맞이 랜선 파티를 하기로 했다. 난 세르비아 식당에서, 친구들은 밤이 무르익는 한국에서 각자 자리에서 만났다. 안 좋은 몸 상태 때문에 혼자 축 처져 있었는데 오랜만에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여행은 어떻냐는 등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까 조금씩 다시 에너지가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벗어난 지 이 주 조금 넘은 거 같은데 벌써부터 한국의 친구들이 그리워질 줄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몇 분만에 화려해진 쌀국수 밥상 덕분에 확실히 기분이 나아졌다. 친구들의 대화 소리를 asmr 삼으며, 잠시 저녁 만찬을 즐겼다. 정말이지, 여태까지 먹었던 쌀국수 중에서 제일이었다. 쌀국수의 면은 물론이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적절한 육수가 우려난 국물에 지나치게 찰지지도, 푸석푸석하지도 않은 아주 잘 된 흰쌀밥까지 넣어서 야무지게 말아먹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그리웠던 국물을 음미하다가 고기가 먹고 싶으면 딤섬 하나 집어 먹고, 속이 너무 뜨거우면 콜라 한 잔 마셔주고, 다시 밥으로 숟가락을 가져가길 반복했다. 결국 몇 분 만에 설거지가 필요 없는 식사를 끝냈고, 세르비아 여행을 하면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익숙한 음식들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까 식당에서 나와 두 발로 걸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 달랐다. 식당으로 올 때는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왔다면, 다시 트램을 타러 골목을 내려가는 길에는 두 발의 의지로 걸어갈 수 있었다랄까. 아시아 음식의 힘이 이렇게 강렬할 줄은 몰랐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마트에 잠시 들러 최대한 죽처럼 보이는 음식과 바나나랑 귤과 같은 친숙한 과일들, 유튜브 보면서 먹을 과자들을 사 갖고 들어갔다. 아, 제일 중요한 약까지. 정말 다행히도 세르비아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약국에 가서 어렵지 않게 약을 살 수 있었다. 다만, 그 약을 하루에 몇 번, 얼마만큼 먹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오랜만에 바디랭귀지 게임을 한 번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이불속으로 돌아와 곰곰이 지난날까지의 나의 여행을 돌이켜 보았다.


KakaoTalk_20220806_215902268_01.jpg 매년 겨울 이 순간이 문득문득 떠오를 거 같다.
KakaoTalk_20220813_081025239.jpg 국제 랜선파티랄까?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을 하면서 즐겁게 새로운 순간들을 맞이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빠진 게 하나 있다면, '나를 위한 휴식'이다. 생각해보니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만큼 혼자만의 시간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쉬지 않고 여행을 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는 데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연이어 약속을 잡으면 힘들어서 금방 지쳐버리곤 해 일주일에 약속을 제한해서 두는 편이다. 평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꽤나 자기 관리를 철저히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나는 잠깐 달라진 환경에서 '나의 루틴'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우치고 나서 뒤통수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앞으로 이번처럼 길게 여행을 할 때는 몇 년 동안 지켜온 나의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즐기자.'라고 다짐했다.


큰 깨달음을 안겨준 쌀국수 한 그릇과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와 식당으로 인도해 준 귬, 근사한 저녁 만찬이 더 근사해지도록 asmr이 되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고마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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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도 맛있다며 추천해 준 호박죽과 두 시간에 한 번씩 먹은 목감기용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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