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홀로 유럽 침대 위에

혼여행의 대명사, 케빈의 모습에서 나를 보다

by 김혜미
Alone on an unfamiliar European bedsheet.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는 귀여운 케빈이 등장하는 '나홀로 집에(home alone)'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보통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지도 않을뿐더러 한 번 봤던 작품을 다시 보는 행위는 더더욱 안 한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예외이다. 케빈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볼만큼 주인공이 좋아서 보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영화의 분위기가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안겨줘서 나도 모르게 연말이 되면 짤막하게라도 찾아보게 된다랄까. 그렇지만 이번 연말만큼은 티비 화면 앞에 누워있는 대신, 낯선 세계를 매 순간 들여다보고 있던 여행자였으므로 잠시 케빈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때, 저번 쌀국수 한 그릇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몸소 실천하고자 북적이는 베오그라드 한복판의 숙소에서 침대 위에 빈둥거리는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그 넓은 방에 홀로 있으니 꽤나 적적해서 잠깐 틀어봤던 티비를 계속해서 틀어 놓았다. 늘 외국에서 보는 프로그램은 재미없어서 티비 볼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대부분의 채널에서 꽤 신선한 미국 시트콤을 계속 방영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영어 듣기 공부도 하고, 한국과는 다른 새로운 전개 방식과 낯선 유머 코드 등을 들으면서 적적한 밤을 흘러 보냈고, 덜 외롭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뭘 하려나?’ 하며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눌러봤는데 어제 방송했던 그 채널에서 ‘나홀로 집에’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익숙한 케빈이 화면 속에 등장하자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다. 때마침 쉼이 필요했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방 안에서 혼자 있게 되면 느끼는 약간의 외로움은 싫어 침대 밖을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노란빛의 숙소 조명도 한 몫 한 거 같다.), 케빈이 등장했던 것이다.


영화는 케빈의 엄마가 차 안의 아이들을 세며 다 모였으니까 출발하자는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흐름이 끊기지 않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화면 속의 엄마를 부르며 집에 혼자 남겨진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집 안을 누비며 원 없이 즐기는 모습을 바라봤다. 뒤이어, 홀로 여행을 떠나 호화스러운 호텔에 들어가서 아이가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내는 케빈의 모험을 보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까지 나홀로 집에 영화를 이렇게나 공감을 하면서 본 적이 있었나?’


케빈이 최대한 여유 있는 척, 웃음을 보이며 혼자 호텔 인셉션에서 체크인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새로운 나라에 발을 들일 때마다 숙소를 옮겨 다니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모든 정보가 담긴 여권을 보여주는 내 모습이 보였다. 또, 안그래도 작은 체구가 더 작아지게 만드는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케빈을 보면서 이전까지 여행하며 호텔에서 묵을 때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감겼다. 처음 유럽 여행으로 파리를 갔을 때 첫유럽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느껴지는 이만저만의 걱정들을 안고 방 안에 들어선 순간, 파리에서 벗어나 비가 엄청 내리는 날 루앙 숙소에 도착해 피자를 시켜 침대 위에서 먹으며 멍하니 보냈던 순간, 이제 유럽 여행이 익숙해져 런던에서 깨끗한 흰 침대를 보는 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때를 지나 또 낯선 침대 시트 위에서 누워 케빈을 보고 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막상 와보니 화려하고 편안해서 좋은데 몇 시간이 흐르면 이 감정이 무뎌져 금세 혼자 낯선 곳에서 동그라니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잠시 찾아오는 적적함을 느끼는 모습에서까지 나를 보는 거 같았다.


몇 년 동안 반복해서 본 영화였지만 이번만큼이나 케빈의 모습에 내 모습을 투영해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크리스마스라는 설렘의 분위기를 느끼고자 봐왔더라면 이제는 여행자로서 케빈의 혼여행의 모습을 공감하게 되었다. 한 번 케빈을 통해 나의 모습을 들여다본 이상, 앞으로도 나홀로집에 영화를 볼 때면 나홀로 유럽 여행을 다니며 매번 바뀌는 침대 시트 위에서 홀로 덩그러니 누워 케빈을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리고 1991년에 혼자 뉴욕 거리를 과감하게 여행 다닌 케빈이야말로 진정한 ‘혼여행’의 고수이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혼여행의 원조 케빈을 따라 'Alone on an unfamiliar European bedsheet'를 찍는 중이었다.


나홀로 유럽 침대 위에
혼여행의 원조 케빈과 함께
Alone on an unfamiliar European bedsheet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