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여행의 대명사, 케빈의 모습에서 나를 보다
Alone on an unfamiliar European bedsheet.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는 귀여운 케빈이 등장하는 '나홀로 집에(home alone)'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보통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지도 않을뿐더러 한 번 봤던 작품을 다시 보는 행위는 더더욱 안 한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예외이다. 케빈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볼만큼 주인공이 좋아서 보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영화의 분위기가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안겨줘서 나도 모르게 연말이 되면 짤막하게라도 찾아보게 된다랄까. 그렇지만 이번 연말만큼은 티비 화면 앞에 누워있는 대신, 낯선 세계를 매 순간 들여다보고 있던 여행자였으므로 잠시 케빈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때, 저번 쌀국수 한 그릇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몸소 실천하고자 북적이는 베오그라드 한복판의 숙소에서 침대 위에 빈둥거리는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그 넓은 방에 홀로 있으니 꽤나 적적해서 잠깐 틀어봤던 티비를 계속해서 틀어 놓았다. 늘 외국에서 보는 프로그램은 재미없어서 티비 볼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대부분의 채널에서 꽤 신선한 미국 시트콤을 계속 방영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영어 듣기 공부도 하고, 한국과는 다른 새로운 전개 방식과 낯선 유머 코드 등을 들으면서 적적한 밤을 흘러 보냈고, 덜 외롭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뭘 하려나?’ 하며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눌러봤는데 어제 방송했던 그 채널에서 ‘나홀로 집에’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익숙한 케빈이 화면 속에 등장하자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다. 때마침 쉼이 필요했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방 안에서 혼자 있게 되면 느끼는 약간의 외로움은 싫어 침대 밖을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노란빛의 숙소 조명도 한 몫 한 거 같다.), 케빈이 등장했던 것이다.
영화는 케빈의 엄마가 차 안의 아이들을 세며 다 모였으니까 출발하자는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흐름이 끊기지 않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화면 속의 엄마를 부르며 집에 혼자 남겨진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집 안을 누비며 원 없이 즐기는 모습을 바라봤다. 뒤이어, 홀로 여행을 떠나 호화스러운 호텔에 들어가서 아이가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내는 케빈의 모험을 보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까지 나홀로 집에 영화를 이렇게나 공감을 하면서 본 적이 있었나?’
케빈이 최대한 여유 있는 척, 웃음을 보이며 혼자 호텔 인셉션에서 체크인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새로운 나라에 발을 들일 때마다 숙소를 옮겨 다니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모든 정보가 담긴 여권을 보여주는 내 모습이 보였다. 또, 안그래도 작은 체구가 더 작아지게 만드는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케빈을 보면서 이전까지 여행하며 호텔에서 묵을 때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감겼다. 처음 유럽 여행으로 파리를 갔을 때 첫유럽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느껴지는 이만저만의 걱정들을 안고 방 안에 들어선 순간, 파리에서 벗어나 비가 엄청 내리는 날 루앙 숙소에 도착해 피자를 시켜 침대 위에서 먹으며 멍하니 보냈던 순간, 이제 유럽 여행이 익숙해져 런던에서 깨끗한 흰 침대를 보는 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때를 지나 또 낯선 침대 시트 위에서 누워 케빈을 보고 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막상 와보니 화려하고 편안해서 좋은데 몇 시간이 흐르면 이 감정이 무뎌져 금세 혼자 낯선 곳에서 동그라니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잠시 찾아오는 적적함을 느끼는 모습에서까지 나를 보는 거 같았다.
몇 년 동안 반복해서 본 영화였지만 이번만큼이나 케빈의 모습에 내 모습을 투영해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크리스마스라는 설렘의 분위기를 느끼고자 봐왔더라면 이제는 여행자로서 케빈의 혼여행의 모습을 공감하게 되었다. 한 번 케빈을 통해 나의 모습을 들여다본 이상, 앞으로도 나홀로집에 영화를 볼 때면 나홀로 유럽 여행을 다니며 매번 바뀌는 침대 시트 위에서 홀로 덩그러니 누워 케빈을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리고 1991년에 혼자 뉴욕 거리를 과감하게 여행 다닌 케빈이야말로 진정한 ‘혼여행’의 고수이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혼여행의 원조 케빈을 따라 'Alone on an unfamiliar European bedsheet'를 찍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