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러시아어로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러시아어로 글을 써보다, 덕분에
기록하는 습관 덕분에 얻은 장점 중 하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유 없이 작은 편지를 준비하여 주며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별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닌데도 그냥 나의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작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전, 편지를 쓰다 보면 그 사람과 여태까지 보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기도 하면서 이 사람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존재인지 한 번 더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내가 느끼는 것처럼 이 친구들에게도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게끔 노력해야겠다라며 스스로 다짐하곤 한다. 이번에도 역시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적어주려고, 작은 엽서들을 미리 한국에서 챙겨갔다. 첫 호스텔 룸메이트로 만나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한눈에 반해 다시 그 사람과 만나기로 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러시아 친구, 스케이트를 배우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에콰도르 친구들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았던 우리, 나의 여행에 큰 힘이 되어준 S언니와 세르비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하나씩 작은 마음을 담아 전해주다 보니 너무 많이 챙겼나 했던 엽서들이 어느새 한 장 밖에 남지 않을 만큼 그동안 인연이 닿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전해졌다. 아직 우크라이나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기에, 오데사 시내에 나온 김에 문구점과 대형 마트도 들려 엽서 찾기의 미션을 통해 연말 느낌이 나는 엽서들을 찾았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M의 부모님께 편지를 써드릴 생각을 아예 못하고 있었다. M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쓰면 되지만 부모님께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 싶었고, 편지를 대신해 트리가 그려진 머그잔을 하나씩 선물해 드리려고 했다. 그러다 여행을 하며,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러시아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맞다, 영어로 소통이 안 된다면 부모님께서 사용하시는 러시아어를 쓰면 되는 거였다. 나에게는 파파고 번역기보다 더 정확한 마샤가 있었다. 바로 마샤에게 나의 기똥찬 서프라이즈를 알려주었다. "마샤! 나 너희 부모님께 러시아로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엽서를 구해 M가 대학 친구들과 자주 다니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 러시아어로 편지를 쓸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해 보았다.
나름 진지한 고민 끝에, 깔끔한 해결책이 나왔다. 먼저, 한국말과 영어로 마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마샤가 카페에서 준 휴지를 반으로 접어서 한쪽에 러시아어로 적어준다. 그러면 나는 엽서에 바로 옮기기 전에 다른 한쪽에다가 똑같이 따라쓰면서 연습을 해보고, 피드백을 받는다. 거의 그림과 가깝게 느껴지는 지렁이 글씨체가 통과되면 엽서에 한 줄씩 옮겨서 적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비록 한국어를 모르시지만 한국어도 함께 다른 한쪽에 써드렸다. 평소 편지 쓰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번 편지 작업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을 계기로, 앞으로 여행을 다닐 때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더라도 그들의 언어로 작은 마음을 담아 편지 쓰는 나의 전통을 이어나가야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새해가 되어, 숨겨두었던 러시아어로 쓴 편지와 마음을 담은 선물들을 부모님께 하나씩 수줍게 드렸다. 상상 이상으로 마마와 파파는 엄청 행복해하시면서 편지를 읽고, 글라스와 스파시바를 외치면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잘 전해진 것 같아 매우 뿌듯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서프라이즈 성공!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