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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리에게 와

시간은 참 솔직한 존재, 우크라이나 여행 마지막 날

by 김혜미
정직한 시간

아쉽게도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안 가더니 꼭, 여행을 할 때면 시간이 참 솔직한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연말연시를 이들과 왁자지껄하게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떠나는 날이 성큼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번에는 저번 헝가리 여행을 했던 것처럼 도중에 다음 여행 티켓을 포기하고,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짝 '한국을 돌아가는 여정을 잠시 미룰까?' 하는 속삭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한국에서의 현실을 그저 회피하고, 책임 없이 여행하고 있다는 찝찝한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날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 게 뻔하였다. 결국 잠시 허황된 상상을 접고, 현실을 마주했다.


떠나는 날 아침, 어느 때와 달리 조금은 착잡한 마음과 벌써부터 그리운 마음을 가진 채 눈을 떴다. '이제 일어나서 부엌에 가면 마마와 파파가 계시겠지, 그러면 날 보고 안아주시며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물어봐 주시겠지?', '근데 이제 이 루틴이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등 뜬 머릿속으로 여러 그림을 그리다가 눈을 꿈뻑이다가 무거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부엌에서 포옹으로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그 누구도 오늘 내가 떠나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참 차분하였다. 유독 그날 하늘도 먹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뒤이어, 우리는 떠나야만 하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는 듯 오히려 더 밝은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였다. 마마가 내려주신 차를 마시면서 마마와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마마가 활짝 웃으며 보여주신 번역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다시 우리에게 와'


눈물이 고이려고 할 쯔음, 눈물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히려 더 웃으며 다시 오면 마마랑은 요리하고 파파랑은 술 마실 거라는 약속을 나누며, 눈물바다 대신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차분하게 시간을 흘러 보낸 후, 나의 짐을 하나씩 정리하며 문 앞에 대기시키는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 그날따라, M네 집의 귀염둥이 '보냐(고양이 이름)'가 내 옆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떠나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늘 부끄러워서 이불속에 숨어있거나, 꼭 내가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마다 활발해져서 돌아다니던 보냐가 떠나는 날 만큼은 내 곁에 와서 애교를 부렸다. 이런 보냐의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보냐의 작별인사를 받으니 정말 떠나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주체하면 안 될 거 같아 마음을 다잡고 다 같이 문 밖을 나섰다.


처음 오데사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맞이했던 우리의 모습과 대조되지만 처음과 끝을 따뜻한 가족들과 함께했다는 여정에 참 감사함을 느끼며, 오데사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마와 파파, 마샤는 나와 함께 공항 안까지 들어가 주었다.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어주시는 파파를 뒤로하고 마샤와 난 손을 잡고 앞장서서 공항으로 향하는데 솔직히 눈물이 몇 번이고 고였지만, 그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옆,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랄까. 분명히 헝가리 여행을 마칠 때, 이제는 더 이상 헤어짐의 아쉬움에서 쩔쩔매지 않고, 쉽게 벗어나 씩씩한 사람으로 성장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 유독 이전 여행과 다르게 이번 우크라이나 여행에서 겪어야 했던 헤어짐은 아쉬움보다는 힘듦을 느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정이 들었는지, 계속해서 눈물이 나려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과 따뜻한 포옹을 주고받고, 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뒤돌아 그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다시 앞을 바라보자마자 웃음이 멈춰버렸다. 대신, 참아왔던 눈물들이 내 동공을 가득 채웠다. 이 와중에, 수화물에 짐을 보조배터리를 넣어서 다시 불려 가서 캐리어를 처음부터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하여 창밖을 바라보자 실감이 났다. '나, 우크라이나 떠나는구나.'


야 루블루 바스
마지막 날, 애교 부리던 보냐
마샤가 한국어로 적어준 새해 편지


이륙하기 전, 잠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반추해 보았다. 다들 분명히 이번에 처음 뵈었지만 모두 나를 소중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주셨다. 늘 조건 없는 사랑과 진심, 정성을 매일 매 순간마다 전해주셨고, 가르쳐주셨다. 이들이 전해준 사랑과 이전 여행지에서 받았던 감정을 통해서, 나도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진심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되고 싶다는 큰 소망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았다(헝가리에서 다짐했던 생각이 두 배가 되었다). 누군가의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미건조한 감정으로 살던 사람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전해줄 수 있으니까.


비행기가 곧 이륙하니 안전벨트를 다 착용하라는 안내 방송이 들려올 때쯤, 이제 출발한다며 고맙다는 메시지를 얼른 남기고 비행기 모드를 서둘러 켰다. 꿈만 같게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창 밖에서는 그림 같은 주황빛, 파랑 빛이 섞인 노을 퍼레이드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잔잔한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노을이었다. 슬픔에 적적한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따뜻한 하늘의 빛으로 마음을 다독여주려고 했나 보다. 가는 길 내내 'Ed Sheeran'의 'Castle on the hill'을 반복 재생하며, 노을과 3주간의 나의 여행에 대한 회상에 취해있었다.


Castle On The Hill을 들으면서, 우크라이나 안녕!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진한 노을로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서 고마워! 하늘아!"

"안녕, 우크라이나! 다음에 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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