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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을 떠나서(3)

ep.3 내가 한국인이라서 좋은 점

by 에미꾸

어릴 때 영어가 배우기 싫어서 엄마에게 나는 절대 외국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한국에서만 영원히 살겠다고 했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 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후회를 하지 않지만 나의 삶에서 후회되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피아노를 그만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영어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둘 다 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나는 내가 음악을 전공할 것이라는 상상조차 못 했고, 이렇게 외국에 나와 살고, 심지어 외국인을 연인으로 만날 것이라고 알지 못했다


피아노는 집념으로 몇 년 치니 학교 수업을 하거나 개인 레슨 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직도 영어는 보통 대한민국의 정규교육을 받은 딱 그 정도의 수준도 안된다.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있으니, 이전보다 영어가 조금은 나아지겠다고 기대하고 있지만,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내 머리는 한국어 수준도 떨어지고 있어서, 아직은 마음만 열어놓은 상태다.


노래를 시작하고 나서 내가 얻은 부수적인 능력 중 가장 앞서는 것은 이상하게도 요리이데, 내가 처한 상황이 요리를 해야 했고 (연습생생활 같은 것을 했었다)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에다가 노래로 자아실현이 잘 되지 않아 무언가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것이 필요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꽤 높은 수준을 갖게 되었다.

나의 특기는 한국에 있을 당시에도 잘 사용했지만, 외국에 나오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무가 없어 아쉽지만 성공적으로 완성한 김장김치와 겉절이와 비비고 김치만두로 끓인 떡 만둣국


오스트리아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김치를 담그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수입하여 파는 김치들을 사 먹을 수 있었지만, 너무 값이 비쌌고 맛이 없고 양이 너무 적었다. 다행히도 남자친구가 매운 음식을 꽤 잘 먹는 편이고 제일 좋아하는 한국음식이 라면, 만두, 국밥과 김치찌개다. 우리만의 설날 겸 그의 생일파티 (설명절 당일이 생일이었다)를 하기 위해 우리는 김치를 담그고 만둣국을 요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흔치 않은 김장을 하는 집에서 자란 나는 이미 김장 경력(?)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외국에서 담근 첫 김치는 나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주었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도 한국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음악을 전공하며 제일 아쉽고 불쾌한 일은 정체성에 대한 비하이다. 나 또한 그랬지만 '외국빠돌이'들이 많은 곳에서 어릴 때부터 생활하다 보니 생각보다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생각을 가진 선생들을 만나는 일들이 흔한데 그중엔 어떻게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사시는지 놀라운 분들도 많다. 보태어 장르 특성상 정답이 없다 보니 사이비같이 본인이 연구한 것이 정답이 되어 학생들에게 큰 혼란을 주기도 한다. 성악을 찬양하다 못해 한국문화와 인종을 비하하고, 외국인 코스프레를 하며 사는 것이다. (차라리 나갔으면 좋겠다) 청소년기 이 부분이 가장 나에게 큰 혼란을 주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자격지심이 나뿐만 아니라 남까지 해하는 위험한 것임을 배웠다.


서른 살이 넘어 자아를 찾는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내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늘 실수를 반복하고 반성하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이제 와서야 나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서 건강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앞서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우리 음식만이 최고다라고 할 순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스펙트럼은 정말 넓은 것 같다. 먹는 것을 너무 사랑하는 나는 하루 끼니의 횟수 내에 먹는 것을 고르는 게 정말 어려운데, 이건 내가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오스트리아에 와서 놀랐던 점은 태어나서 해산물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곳은 내륙지방이라 그럴 법도 하겠다만, 고기보다 회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첫 문화충격이었다.


음식과 디저트에 상관없이 유행하면 수많은 가게들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접한 뒤 살아남는 점포가 생긴다. 유행에 예민한 우리의 분위기를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것이 내 식(食) 견을 넓혀줬다는 사실은 몰랐다. 마라탕과 탕후루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직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

닭발을 먹을 순 있지만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몰랐던 내가 수 차례의 도전 끝에 결국은 닭발의 맛을 깨우치고 마니아가 되었다. 이처럼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 것에 참 도전적이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좋은 점은 이렇게 넓은 식(食) 견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고, 어릴 때 교과서에서 봤던 지구촌이 현실이 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食) 견이 무한히 넓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다른 장점들이 많고 사실은 약점도 있지만, 장단이 뭐가 중요한가? 맛있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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