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 인생은 고스톱
한국에서 화투를 챙겨 나왔다. 에피소드 1화에 언급되었듯이 47킬로의 화물 중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인데, 생각보다 비행기 수화물 가격이 비싸 추리고 추린 것 중 화투패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학창 시절 한 때 친구들과 정말 열심히 화투를 쳤고, 점당 10원으로 하루에 4천 원까지 잃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얄짤없는 스타일이라 처음 게임을 배우는 나에게 아무도 규칙을 알려주지 않았고 잃으면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고생들이 모여 돈을 걸고 화투를 치는 모습이 교장선생님께 발각되어 매 쉬는 시간마다 '앉았다 일어났다'라는 체벌을 100번씩 해야 했다. 7교시 이후 700번을 채우고 석식시간엔 운동장까지 오리걸음으로 돌았다. 다음 날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고 다리를 저는 모든 사람은 화투패거리였다. 모든 화투를 압수당해 더 이상 칠 수가 없자 이 귀여운 여고생들은 화투를 종이에 그려서 종이인형 놀이를 하듯 화투를 또 쳤다. 모든 것은 한 때 이기 때문에 점점 대학 진학준비로 시간이 없자 자연스레 이 화투모임은 사그라들었다.
친구들과 웃으며 '우리 할머니 될 때 까지도 이러고 있을 것 같지 않냐?', '우리 할머니 돼서도 이렇게 같이 화투 치면서 살자'라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주 끔찍한 저주였다. 그 당시 순수한 시선으로는 모여서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여자들의 진하고 은밀한 우정'같아 보였나 보다.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서 작은아버지 고모와 함께 화투를 즐기곤 하는데, 고모는 항상 나에게 '쟤 좀 가르쳐야 된다. 어디 가서 당할 것 같다'며 내가 잃은 판돈에 게임비까지 다 몰아서 용돈으로 주셨었다. 어릴 때 시작한 것 치고는 실력이 형편없는데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고, 셈에 빠른 머리가 아니어서 인 것 같다. 작은 빨간 패 48개로 만들어지는 화투판은 내 손 안의 몇 장의 패로 승리를 설계하고, 상대방의 상황과 생각까지 예측해야 하며, 버리는 패까지 승패의 통계를 계산하며 하는 게임인 것이다. 왜 치매예방으로 어르신들께 장려하는지 알겠다.
화투를 굳이 이 먼 타국 땅까지 들고 온 것은 남자친구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 반, 나중에 우리 가족들을 만났을 때 외국인이 화투를 치면 얼마나 재미있고 빨리 융화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반이었다.
이 친구는 매사에 탐구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인터넷 검색을 시작으로 바로 화투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나도 헷갈리고 있던 패가 가지고 있는 숫자를 이번에 완벽히 익히게 되었다. 이 친구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5광으로 게임을 이겼고, 친구에게 한국인의 수치라는 소리를 들었다. 현재 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 전이나, 무료한 저녁식사 이후 시간을 화투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심지어 화투 피크닉도 두 차례 다녀왔다.
소파에 외투나 앞치마를 깔고 화투를 치는 모습. 첫 5광으로 승리한 기념사진도 있다. 이 지역은 겨울에 뷤 브릴레(뱅쇼 같은)라는 데운 와인을 밖에서 먹는데 보온병에 와인을 싸와서 마셨다.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깜깜한 가운데 핸드폰 라이트로 화투를 친 것이 아주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멀리서 보면 점을 치는 동양여자 같아 보였을 수도 있다.
이 게임이 매력적인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닮아서가 아닐까? 내가 가지고 있는 패가 정해져 있고 주어진 이 패로 승리를 해야 하는 것. 처음부터 먹으려고 했던 패를 앞에서 홀랑 먹어버리거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똥을 싸는 일.(3장의 패가 합쳐지는 것을 똥을 쌌다고 표현한다) 낼 패가 없어 패를 한 장 버렸는데 뒤집은 카드가 같은 예기치 못한 행운을 잡는 일, 승리의 점수를 얻어 계속 게임을 이어가는 GO를 외쳤는데 다른 두 사람이 합심하여 내 질주를 방해하거나 더 큰 승리와 실패의 리스크 사이에서 내려야 하는 STOP까지.
살아가며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그 선택들이 내 삶을 만들어 간다. 항상 좋은 결정을 내려서 계속 이기고 GO만 있었으면 좋겠으나 판에는 항상 똥도 있고 박(패가 부족한 일)도 있다. 내가 내 뒷사람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 사람이 먹고 싶은 것을 홀랑 먹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미래의 나에게 걸며 GO를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