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나무 숲을 떠나서(2)

ep. 2 불안을 먹고사는 사람들

by 에미꾸


Graz 내에 있는 길을 지나는 터널, 안에 공연장도 구비된 큰 터널이다.



서른 중반이 넘어 청소년 시기에 하지 못했던 자아 찾기를 하다 보니 나의 근본인 가정과 부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난다. 내가 어떤 곳에서 자라는지 그 안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으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우리 가정이 '독특하다'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이 독특함은 어머니 아버지의 유전적인 요소와 더불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 화학적 반응의 조합이겠지만 살다 보니 이 화학적 반응안에서 자란 것이 아직까지는 내 삶을 통틀어 제일 감사한 일이 되었다.



나는 야망은 있었으나 순진한 부분이 있었다. 다시 돌아가면 절대로 하지 않을 전공(음악)을 하고 말도 안 되게 긴 연습생 같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연습생이라는 것은 아주 고급스러운 표현이고, 강제 노역이나 착취에 가까웠다. 제일 오래 배웠던 성악선생님은 불행히도 사이비였는데, 외국에 오래 살진 않았지만 (6개월 남짓) 외국의 모든 문화나 사상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인터넷으로 발성과 음악을 깨우치고, 느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순진하게도 어릴 땐 정말 그런 줄 알았고, 커서는 내가 여태껏 들인 내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정리하지 못했다. 마지막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나에게 돌아온 것은 한 시간이 넘는 감히 자판으로 쓰지도 못할 욕설과 폭언이었다.


아직도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긴 시간 동안 나에게 무한한 지지와 조력을 해준 것에 대한 미안한과 감사함 때문 일 것이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눈으로 보이는 결과들이 너무 볼품없고 효율이 없어 아직도 불안감에 싸여있다.


환경과 직업이 이렇다 보니 내 주변에도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종종 공황장애를 겪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 역시 제일 불안한 대학교 졸업 직전 처음으로 공황장애 증상을 겪었는데, 그 당시는 '공황장애'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꽤 오랜 기간 한의원에 다녔다. 한의원에서는 '화병(홧병)'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나 겹치는 부분이 있다. 뜸을 뜨고 침을 맞아서 인지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인지 숨을 못 쉬고 잠을 자지 못하는 증세는 많이 호전되었고, 더 이상 한의원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내 사이비선생님은 어디서 배운 교육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안증을 하나의 재능으로 묘사했는데 특별한 걱정이나 불안 없이 자라온 나는 그곳에서 재능 없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속이 편할 수가 있냐는 지론이었다. 늘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서 찬 밥 신세로 가니 오히려 승부욕이 생겼다. 노래를 잘해서 노래를 선택했는데, 노래를 못해서 매일 우는 이상한 아이러니 속에서 노래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굴레에 빠지고 만 것이다.


선생님의 원리에 따르면 스승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홍보하게 되고 새로 내가 데려 온 (전도한) 학생이 나의 믿음의 결실 겸 노래를 잘하는 증표였다. 어이없게도 나는 이곳에서 전도왕 출신이다. 하지만 나오기 직전까지도 나는 이곳에서는 출신 학교와 커리어와 상관없이 '노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노래 못하는 것이 선생님의 꿈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본인 입에 달고 살던 '교보재'였을까.


장르를 불문하고 남에게 불안을 종용하는 어른들이 있다. 사랑과 우정으로 이야기하는 부모나 친구 또는 내 경력을 도와주려는 상사나 직장동료 일 수 있겠다. 이 불안 요소가 삶에 대한 욕심과 교묘하게 결합해 일어난 화학반응은 꽤나 멋져 보인다. 당연히 치러야 할 희생인 것처럼.

적당한 불안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긍정적으로 쓰일 때가 분명히 있지만 불안을 과식하지 말자. 항상 과식은 화를 부르니까.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따뜻한 사랑은 많이 먹고 이용당하는 불안은 토해내길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