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 낭만의 순간들
오스트리아로 온 것이 힘든 여정을 떠나기 전 나에게 주는 아주 고급 선물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더 노래 생각을 안 했다. 이번 유학의 가장 큰 목표가 나에게 있는 불안을 인정하고 자유한 태도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면으로 시도를 해보고 있다. 처음에 그라츠를 둘러볼 때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노래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고 싶어서 바로 조깅을 시작하려고 조깅 포인트들을 지도에 저장해 놨었다. 이틀정도 후 '하나에만 충실하자'라고 생각을 바꿨다. 한정된 시간에 그의 삶을 함께 보내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그와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모든 기간 중 며칠은 집 밖을 나가지 않은 날도 있었다. 정말 일상을 보냈다.(나름대로 서로 위해주고 신경 쓰느라 결국 내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둘 다 병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낭만적이었던 음악적 순간들이 있어 같이 나누고 싶다.
그가 생일 선물로 어머니께 공연을 볼 수 있는 바우처를 받았다. 나에게 같이 그라츠 필하모닉 연주를 보러 가겠냐고 물어봤고, 나는 이탈리아에 비해서 클래식 공연이 무척 싸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좌석이 비싸 깜짝 놀랐다. 어쨌든 그는 본인의 생일 선물을 나와 함께 나눠줬고, 나는 고마운 마음에 점심은 그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요리했고, 저녁은 내가 계속 먹고 싶었던 햄버거를 그에게 사주었다.(웃음) 패스트푸드인 햄버거가 얼마나 비싸던지 나름 가성비가 있는 가게를 골랐지만 거의 37유로를 썼다.(한화 55000원) 감자튀김도 돈을 많이 쓴다고 못 시키게 했으나 우겨서 하나를 겨우 시켰고, 소스까지 다 긁어서 먹었다.
가게의 내부 전경_프랜차이즈 버거집 인테리어 + 플랜테리어가 묘하게 섞였다. 이유는 가게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분해해 그것으로 작물을 기른다는 친환경이 콘셉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가정들이 집집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얘기해 줬다. 기본 버거와 새우패티가 들어간 버거, 감자튀김 (시그니처소스 추가), 귀엽게 포장한 일반 맥주. 맛은 건강한 맛이었다. (맛은 나쁠 게 없으나 사악한 가격으로 앞으론 오스트리아에서 버거는 해 먹으려 한다.)
오랜만에 차려입고 극장에 들어서니 내가 연주하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그라츠 필하모닉의 젊은 지휘자는 바이올리니스트인 것 같은데 게스트로 오는 비올리스트와 함께 합주를 (지휘와 함께) 멋지게 했고, 젊은 아티스트가 줄 수 있는 열정과 매력을 흠씬 뿜었다. 훌륭한 연주도 나에게 충격을 줬지만 제일 크게 받은 문화 충격은 인터미션(중간 쉬는 시간)에 사람들이 뛰쳐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 짧은 10-15분의 시간 동안 간단한 다과(음주이지만 많은 양이 아니기에 다과라고 표현함)를 즐기기 위해서 인데, 공연 중간에 모두 나와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정말 신선했다. 우리도 시간에 맞춰 화이트 와인을 시켜 마시고 나머지 공연을 마저 관람했다. 평소에 즐겨 듣는 Gustav Mahler(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이었다. 오랜만에 집중한 시간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뛰는 심장의 고동을 나눴다. 이래서 중간에 술을 마시나 보다.
멋진 공연을 선사한 지휘자와 비올리스트. 공연장 내부_유명한 작곡가들의 이름과 초상화가 걸려있다. 인터미션에 모두 한잔씩 하는 모습 이미 좋은 자리는 만석이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 주는 떠나기 전 음악회를 두 개나 관람했는데 그의 친구의 친구가 그라츠 오페라극장의 직원이라 공연 티켓을 저렴히 구해줬다.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장 4시간 반의 (5시간이 넘지만 편집으로 줄였음) 베를리오즈의 트로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다'라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대 없이 봐서 그런가 예상외로 재미있게 봤다. 쉬는 시간마다 부지런히 나가 술도 마셨다. 감각적인 무대연출도 좋았고, 간간이 보이는 한국인들도 무척 자랑스러웠다. 내 마음속에 묘한 두 가지의 감정이 들었는데, 하나는 두려움 하나는 부러움이었다.
극에서 다양한 배역을 임팩트 있게 소화하신 김대호(베이스)씨를 공연 한 주 전 우연히 만났다. 목소리가 누가 들어도 성악가라 자연스럽게 말이 이어졌고, 너무 감사하게도 많은 조언과 내게 필요한 얘기들을 해주셔서 내 마음이 한결 정돈되었다.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아 이번 주 공연을 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얘기하신 게 무색하게 무대에서의 연기도 노래도 참 좋았다. 얘기 중 스스로를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하셨는데, 일반 직종도 외국에서 정착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데, 종주국에 가서 외국인이 성악가로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실 감이 잘 안 온다. '나도 너무 하고 싶다'와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공연 내내 충돌했다. 공연을 마치고 공연을 소개해준 그의 친구들과 공연 얘기도 하고 자리를 옮겨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아침까지(무려 6시) 시간을 보냈다. 나도 어디서 체력으로 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꽤나 벅찼다(웃음)
그라츠 오페라 극장 내부 전경을 담기 위해 제일 위층에 올라와 사진을 찍었다. 1층 좌석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보이지 않는다. 오페라 극장 외부의 모습 전쟁 전에는 더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실 오페라를 본 이날은 발렌타인데이였는데, 낮에 마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꽃을 사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 날은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이나 초콜릿을 주는 날이었는데, 여기서는 아니었고 심지어 '그럼 여자는 언제 주냐'는 질문에 '여자는 그냥 받기만 해'라는 대답을 듣고 둘이 깔깔 웃었다. 나는 꽃 대신 일본 식당에 가서 오랜만에 라멘과 생맥주를 먹었다.(꽃보다 좋았다)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새큼한 살구잼을 넣은 빵을 하나 나눠먹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같이 춤도 췄다.(둘 다 춤은 정말 못 춘다. 뻔뻔하게 즐길 뿐이다.)
화려한 두 차례의 음악회도 친구들과 신나게 흔들어 재꼈던 펍에서의 입맞춤도 모두 낭만적이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낭만은 가장 편한 옷을 입고 내가 요새 즐겨 듣는 이소라, 유재하 노래를 함께 들은 그 시간이었다. 사진도 없고 자세한 기록도 없지만 그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