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아빠를 닮은 남자
예전에 친구들과 나눈 담화 중에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은 극명하게 '네', '아니요'로 갈리는데 '네'라고 대답하는 여자들이 아버지와의 애착관계가 잘 설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에게서 긍정적 감정, 부정적 감정 어느 부분이 되었던 그것을 기반으로 배우자와의 미래를 그리는 것이 여자라는 것이다. 내 친한 친구 한 명은 절대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게다가 남편을 만나는 기준에 절대 아버지 같지 않은 정반대의 사람과 결혼했다고 했다. '예', '아니요' 둘 다 삶을 그리는 데 큰 척도가 된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절대 스포츠를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앞선 에피소드에 잠시 언급되었듯이 아버지가 대단한 스포츠 마니아이며, 이 수많은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볼멘소리로 우리에게 투정한 것임을 잘 안다. 왜냐하면 아빠는 엄마의 환갑잔치에도 점심을 아주 급하게 드시고 축구경기를 뛰러 가셨고, 엄마는 쿨하게 아빠를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와이프 환갑에 프로선수가 아님에도 경기를 뛰러 가는 남자를 정말 한치의 불쾌함 없이 보내주는 엄마의 모습이 멋졌다. 우리 엄마는 흔치 않은 자식보다 남편이 우선인 사람이었는데, 말에 오해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우리 형제를 무척 사랑하고 아직까지도 헌신하고 계시지만 우리에게 항상 '나는 너희보다 너희 아빠가 먼저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어린 나이에 아빠에게 불만이 생겨 눈이라도 흘기는 날이면 엄마는 그 어떤 것 보다 호되게 혼을 내셨다.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아빠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들이 그대로 구전되어 엄마처럼 우리도 아빠를 참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는데 동생이 데려온 남자인 '제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그가 내 가족임을 알았다. 내 피가 그가 나의 가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나 정체성의 큰 부분이 나의 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그에게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사실인데 나와 유적적으로 다르지만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와 닮아있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을 SNS나 카톡프로필 사진으로 공개한 적이 없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먼 타국에 있으니 보따리를 조금 풀어 보고 싶다.
내가 그를 매력적으로 느낀 첫 부분은 성실함과 생활력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타국에 와서 공부하고 자리 잡아 직장생활(전문직)을 하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다들 알겠지만 유럽은 화장실을 가기가 불편하다. 기차는 화장실이 공짜이니 꼭 기차에서 화장실을 가는 모습이라던가 2,3만 원 남짓을 더 쓰고 싶지 않아 신분증을 종이로 사용하고 이 신분증 때문에 크고 낡은 지갑을 사용한다. (같이 있을 때 받았던 불시검문에서 이탈리아 사람들도 신분증이 종이로도 발급이 되는 사실을 몰랐어서 놀라워했다.) 양말도 누더기가 될 때까지 불편함 없이 빨아 신는다. 자기 자신에게 지독할 정도로 허투루 돈을 쓰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식사를 사는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사실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국 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때 두려움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외국어로 대화해야 하니 소통이 시원스럽지 않았고, 나는 관상은 과학이라고 생각하는데(웃음), 외국인 관상도 모르겠고 사람에 대한 파악이 빨리 되지 않아 답답했었다. 제일 문제는 시차였는데 이 사람의 일이 일찍 끝남에도 불구하고 4시 반에 일이 끝나면 나는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일반 전화로는 의사소통이 힘들어 주로 주말에 영상통화를 했다. 첫 시작이 이렇다 보니 내가 이탈리아로 가면 기차로 10시간의 거리가 생기지만 같은 시간대에만 살아도 이제는 만족스럽다. 문화를 힘들게 맞추려 하지 않고 배려를 기반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맞는 관계가 되었다.
불안했던 관계의 시작에서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좋은 사람일 거야'라는 소망을 가졌고, 솔직히 말하면 2주도 안 되어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잠잠히 생각해 보니 말로만 하는 것보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좋았다. (말로만 '씨불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으나 참는다.)
아빠도 어릴 때 타지에 나와 힘들게 공부하고 19세부터 일을 시작하여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다. 몇 해전 아빠의 퇴직식에 참석했는데 40년을 넘게 한 직장에서 근무하신 드문 경우로 화려하게 은퇴하셨고, 한 달을 채 못 쉬신 채 나이 든 딸을 더 키워주고 싶어 재취업을 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아빠의 고생 덕분에 고상하게 공부하고 먹고살았다. 아직도 내 삶이 정착하지 못했고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갚을 방도가 없어 내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드렸었는데, 대학까지 통학을 했고 출가를 30대 중반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마당에 나가 부침개를 부쳐먹고 주말엔 엄마 아빠와 함께 하이킹을 많이 했다. 내가 그 당시 엄마아빠의 대나무 숲이었다. 두 분 다 아직까지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분들이고 리더라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마음이나 고민을 큰 딸에게 나누며 털고 다시 힘을 내셨다.
이제는 타국에 있어 내가 유일하게 드릴 수 있었던 내 시간조차 드릴 수가 없어 속상하지만 지금도 받고 있는 감사한 것들을 마음속에 새기며 충실하게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합성한 나와 그를 포함해) 이번 설 명절에 가족별로 티를 맞춰 입은 모습,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