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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Sep 30. 2015

계속 다짐하는 사람이 될 테다.

가을에 꺼내보는 작년 겨울의 다짐

작년 겨울에 이런 글을 썼다. 그리고 실행하지 못한 계획이 되어버린 채로 이제 가을이다. 그리고 아마, 겨울이 오면 또 이런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혹시 또 실패하더라도, 나는 계속 다짐하는 사람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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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농사를 지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요 며칠 계속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이 생각이 결심으로 바로 이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강력한 귀차니즘 때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가 증명한 대로 농사는 얼마나 부지런함을 요하는 일인지! 나는 날마다 땅이 부르는 소리, 생명이 돌봄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외침을 감당해낼 만큼 부지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발단은 올해 가로 다섯 걸음, 세로 열 걸음 정도의 정말 작은 텃밭에서 쏟아져나온 먹거리의 많은 양을 제 때에 제대로 먹어주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덕에 의도치 않게 무농약 농산물(농약 살포를 한 적이 없음, 집에 농약이 없는데다가 뭘 뿌려야 하는지 모름)을 길러내게 되었고 그 풍성한 혜택을 우리 마을 까치와 참새와 함께 누리며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혹은 ‘살고 말았다.’).


2015년에는 남편과 내가 먹고도 남는, 아마 갈아서 온몸에 팩을 하고도 남을 그 텃밭채소들(ex. 각종 쌈채소, 오이, 고추, 호박, 배추, 토마토, 파프리카 등)을 텃밭이 없는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요즘은 도시에서도 베란다나 옥상에 텃밭을 가꾸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트렌드에도 미처 발 붙이지 못할 만큼 바쁘거나 혹은 공간이 없거나 혹은 무지하거나 혹은 게으른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내가 도시에 계속 살았다면 집에 여유공간이 없거나 바쁘거나 무지하거나 게으른 사람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텃밭채소에 덧붙여 내년에는 올해 수해복구 공사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한 땅을 일구어 옥수수와 고구마, 참외과 수박을 심어보리라. 사실 이것들은 내가 심지 않아도 주변에서 워낙 많이 가져다주시는 바람에 올해도 넘치도록 먹었지만 내 손으로 기른 옥수수를 쪄먹는 기쁨에 비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두 번째 이유이며 더 핵심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왜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는가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삶이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획과 이끄는 힘에 의해 흘러가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곳으로 와서 살게 된 목적과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곳에서 충분히 행복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다. 참 좋은 이웃들을 만나 사랑받으며 좋은 공기와 멋진 경치를 즐기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나의 행복만을 위한 이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출퇴근에 묶이지 않고 홀로 있을 수는 시간의 빈 곳을 독서와 글쓰기로 채우기로 했다면, 양분과 좋은 흙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삶으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오게 되었다면 의당 땅을 일구는 삶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변의 수 많은 농부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에 살고 있어서 모든 좋은 조언들을 받을 수 있는 이 좋은 환경을 전혀 선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생각해보면 고향도 농촌이고 지금 사는 곳도 농촌인데, 사실 모르고 살았지만 나는 농부로 태어나 살도록 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좀 너무 멀리 나간 생각까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땅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한동안 맘스패키지를 받았던 적이 있다. 맘스패키지는 한 달에 만원대의 회비를 내고 매달 선물상자를 받는 것인데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내가 받았던 상자에는 감기사탕(허브사탕), 온천 성분 비누, 유기농면수건, 허브차나 원두 등이 들었있었다. 자잘한 것들이 많아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를 선물이 한 달에  한 번씩 온다는 것이 묘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받고 있지 않지만 한동안 팍팍한 일상에 쏠쏠한 재미를 주는 아이템이었다. 이 맘스패키지처럼 텃밭패키지를 한번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미 이런 농산물 패키지는 많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수익사업으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주 아주 아주 소규모로.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번 정도 제철 텃밭 채소가 담긴,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선물상자, 설레지 않을까? 회원은 아마도 지인들 중 몇몇이 될 테고 가끔 손편지도 주고받고 하면 더 정겹지 않을까? 회비는 모종값이나 비료값으로 쓰고 비료사고 남은 돈으로 읍내 나갈 때 치킨 사먹으면 좋겠다. 하- 생각만으로는 참 아름답고 행복하구나. 농사는 본격적으로 지어보기도 전에 싸 보낼 생각부터 하나 싶기도 하지만, 뭐 생각은 자유니까~

어쩌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텃밭패키지는 실행 가능한지 아닌지 모르겠고 토종씨앗도 많고 많은 나의 관심사 중 하나.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일단 농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지어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5년은 벌써부터 바쁠 것 같은 예감이 드네. 아, 겨울 동안 잘 쉬어야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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