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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Sep 30. 2015

부대찌개 단상

한 그릇의 밥이 그냥 밥이 아닌 날이 있다. 밥이 책인 날.

더 정갈하게 담아볼걸.

처음엔 참 단정하고 깔끔하다. 

깍둑깍둑 썰어서 차곡차곡 빙둘러 담은 전골냄비처럼. 

그 정갈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계속 잘 있어주면 참 행복할 것만 같다. 


뜨거운 불 위에 올라가도 한동안은 그대로다. 보글보글 기포가 좀 올라오지만 참아본다. 

자리를 유지해서 어떻게든 처음 모습 그대로 이고 싶다. 


하지만 냄비 안은 점점 뜨거워지고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육수가 이제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출렁인다.

밑에 깔아놓은 김치들,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국물을 벌겋게 흐려놓고 다시 가라앉는다. 맑은 국물은 이제 없다. 양념장에 섞어놓은 고춧가루들과 마늘파편이 어지럽게 떠다닌다.
버섯, 양파는 자리를 이탈한지 오래고 날씬하던 어묵들은 퉁퉁 불어버렸다. 모든 게 엉망으로 뒤섞인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엉망이 된 후에,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처음엔 전혀 예상도 못했던 라면사리가
더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이 곳에 떡하니 들어와 한중간을 차지한다. 마지막에 대파가 흩뿌려질때쯤엔 이제 아무 생각도 없는 포기상태. 이 모든 걸 지나야 비로소 부대찌개는 완성된다.


처음의 정갈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한 번도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그런 모습으로 그제야 상에 오른다. 생생하고 싱그러운 상태가 아니라 모든 재료들이 숨이 죽을 대로 죽고 자기 모습보다는 국물 색깔에 더 젖어들었을 때. 그래서 그 무엇도 더는 자기 공간, 자기 향기를 주장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야 한 냄비의 요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가장 드러내는 길임을, 햄도, 어묵도, 버섯도, 육수도 깨닫게 된다.


나는 오늘 밥 한 끼를 준비하며 지금까지의 가족, 친구관계와 공동생활과 현재의 결혼생활과 앞으로의 인생길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의 모습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겉으로 생생한 젊음만이 최고라고 여기지도 않겠다. 그리고 가끔, 예상치 못한 라면사리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라면사리가 없었다면 밋밋했을 오늘의 부대찌개를 생각하겠다. 그리고 숨이 죽고 국물에 우려낼 나만의 깊은 맛은 무엇인지 찾아보겠다. 그렇게, 그렇게 내가 호박이어도 좋고 햄이어도 좋고 후춧가루 몇알갱이어도 좋을, 그런 맛깔난 부대찌개 같은 인생찌개를 끓여낼 수 있길. 그 완성과 끝을 아는 건 요리사뿐이다. 맛은 보장한다. 


덧.
부대찌개 완성샷은 생략.
앞으로를 기대하며, 부대찌개도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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