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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Oct 14. 2015

사실 언제나 그랬다.

오늘 아침 메뉴, 찐 단호박과 고구마. 아직 사 오지 않은 우유 한 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 밤 찾지 못한 귀중품을 찾기 위해서다.  어제 저녁 해가 지고 으슥해질 8시 반 무렵 집으로 전화가 왔다. 집 전화로 전화가 온다는 것은 마을 어르신이라는 얘기다. 6시 경에 전화를 해 보니 내가 집에 없더란다. 아마도 그 시간은 내가 홍천 읍내 문구점에 가느라고 나갔다가 막 들어오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집 앞에 마을회관 화단에 뭘 두고 왔으니 날 밝으면 찾아서 들여가 잡수시오 하는 용건의 전화였다. 단호박이란다. 나는 깜깜한 8시 반에 가로등 드문 드문 있는 시골길로 나갔다. 그날따라 손전등이 어찌나 희미한지. 건전지를 갈 때가 되었는데 손전등을 켤 때는 생각이 나고, 집에 들어오면 건전지 생각이 전혀 나질 않으니 큰 일이다. 어쨌든 켠 듯 만듯한 손전등 하나를 들고 안개마저 자욱한 신작로로 나갔다. 여기서 신작로란 정말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새 길이 아니다. 아마도  몇십 년 전에 닦인 길인텐 데도 마을 어르신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길을 신작로라고 부르신다. 그나마 이 길이 자동차 2대가 겨우 마주쳐 지나다닐 수 있는, 마을을 통과하여 다른 마을로 갈 수 있는 가장  큰길이다. 어쨌든 이 신작로로 나가 정말 깜깜한 마을회관을 여기저기 비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깜깜한 회관 앞에 소주병 몇 개와 누런 마대자루가 어찌나 무서워 보이던지 더 찾지 못하고 그냥 집에 부리나케 들어왔다. 이렇게 어제 야식은 물 건너간 것이다.


이 단호박으로 말하자면,

그분이 일일이 설명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이런 것이다. 요즘 그 어르신은 단호박 밭으로 일을 다니신다. 여름에는 주로 인삼밭이나 호박, 브로콜리 밭으로 다니시다가 요즘은 그 밭주인이 단호박도 기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인인 단호박 밭을 다니시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단호박 밭에 일을 다니신다. 단호박을 따서 크기별로 고르고 어떤 것은 반으로 자르고 포장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꼭 못 파는 물건, 여기 어르신들이 쓰시는 단어로 하면 '파치'가 생긴다. 그러면 그 파치를 주인이 일꾼들에게 그냥 주거나 혹은 싼 값에 팔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준다. 그렇게 가져온 파치가 무슨 이상이 있는 물건 인가 하면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예쁘게 잘리지 못했다거나 꼭지가 너무 짧게 다듬어졌다거나 좀 휘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일을 해서 일당도 받고 파치도 받아서 일을 마치는 저녁 6시경, 일꾼들을 데려다 주는 차로 퇴근을 한다. 그때 신작로를 지나다가 길 옆 마을회관 화단에 그 날 얻은 파치 단호박을 두고 가신 것이다. 내가 집에 있어 전화 통화가 되었다면 신작로로 잠시 나오라고 했겠지만, 통화는 안되고 주인 양반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집까지 가져다 줄 수는 없고 가까운 회관에 두고 가신 것. 이렇게 가져다 주시는 쥬키니 호박이며 단호박이며 브로콜리가 제법 되었다.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퇴근할 때 무겁게 파치를 챙겨 지나가는 길에 일부러 나에게 주시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런 파치들이 아니더라도 텃밭에 기른 것들이 잘 되었을 때 나누어 먹자고 퍼 돌리시는 분들이 많다. 이런 분들은 봄에 나누어 먹기 위해 일부러 자기 먹을 것보다 넉넉하게 심으시곤 한다. 내가 시골에 살면서 기르는 작물이라고 해봐야 오이 몇 개에 호박 몇 개, 토마토 조금, 상추 정도지만  여기저기서 얻어 먹는 채소들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3 계절에 채소와 푸성귀는 언제나 넘쳐난다.


난 이곳이 참 좋다.

시골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는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시보다는 훨씬 훈훈하다고 느껴진다. 도시에서는 일단 나부터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몰라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이 마을의 온 산과 밭이 이 분들의 집이며 일터이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마주치게 되는데다가 이 산골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농사와 산에 다니는 일(버섯, 나물 채취)이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직종 종사자로서 정보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네 집에 뭐가 심어져 있는지 어느 집에 뭐가 없는지 파종만 하고 나면 모두가 알게 된다. 그러니 '이거 없지?' 하면서 서로 퍼돌리고 나누어 먹는 것이다. 주로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많아 모두의 관심대상이며 덕분에 언제나 먹을 것이 넘쳐난다. 물론 이런 생활방식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같이 일 하다가 싸우기도 하고 싸웠다가도 또 같이 일하는 전원일기 속의 장면들이 처처에서 벌어지는 이곳 생활이 나는 정말 재미있다. 내가 시트콤 작가라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쓸 것이다. 한 때는 이런 이들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내공부족이라 쉽사리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는 마을회관으로 나가 화단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단호박을 가져왔다. 밤에 잘 안 보인 이유가 이 검은 비닐봉지 때문이었나 보다. 이렇게 얻은 단호박과 지난주에 얻은 고구마를 함께 쪄서 오늘 아침메뉴로 삼는다. 여기에는 응당 우유가 곁들여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차를 타고 5분 거리의 면소재지에 있는 슈퍼까지 나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가는 김에 농협에 들러 전기요금도 내야지. 그러다 보니 아침식사 시간이 좀 느춰지긴 했지만, 브런치라고 이름 붙이면 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런치를 거를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서 우유 사러 가야겠다. 배고프다.


이렇게 오늘도 다른 이의 호의와 배려로 먹고 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 언제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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