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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Oct 16. 2015

있는 힘껏 자기 자신이 되기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아침에 카톡이 왔다. 어디 어디에 마른 고추를 가져다 놓았다고. 내가 전에 고추기름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나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내가 생각나서 한 움큼 가져다 놓았단다. 직접 기르고 말린 태양초 고추 한 봉지. 덕분에 나도 오늘 고추기름 만들 수 있겠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태양초 고추를 집 안으로 들여놓고 나는 다시 나왔다. 마당에 나가 가만히 새 소리를 듣다가, 낙엽이 내리는 어쩐지 짠한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햇살이 마지막 한톨의 대추를 익히려 부지런히 떠오르는 발걸음 소리도 듣고, 람쥐람쥐 다람쥐가 나무 밑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새들의 수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도 바라보았다. 이 새소리로 말할 것 같으면, 꼭 이 시간쯤 그러니까 해가 떠올라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기둥 중간쯤까지 비추고 있는 이 시간쯤이 절정이다. 마치 나무에 핀 조명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이 때가 되면 참새니 까치니 이름도 모를 산새까지 죄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밤나무와 은행나무, 느티나무에 모여든다. 소리로 가늠해보건대 족히 백 마리는 넘겠다. 핀 조명 들어왔다고 다들 한 곡씩 뽑아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그리 격렬하게 토론을 하는지, 그도 아니면 어제 밤 드라마 얘기라도 하는 것인지 수다가 정말 엄청나다. 한 목소리를 내어 같은 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시끄럽지 않다. 소리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작은 파동들이 나뭇가지 곳곳에 걸려 있는 것들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 파동이 겹치고 흔들려 생기는 멋진 무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하긴 이것도 자연의 배려겠다. 소리가 보인다면 너무 작고 연약한 새들이 어디 있는지 잘 들킬까 봐 걱정한 따뜻한 배려. 모든 약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숨겨주기 위한.

작은 파동은 커녕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가면 새들마저 다 날아가 자취도 없다.



관심을 귀에서 눈으로 옮겨 한 바퀴 빙 둘러보면 눈 가는 곳마다 호강이다. 제 각기 다른 초록이었기는 해도 모두 초록이었던 나뭇잎들이 노랑과 빨강으로 나누어지고 그 노랑 안에서도, 그 빨강 안에서도 또 나누어지는 색깔파티. 거기에 파란색 하늘이 배경이 되어주니 어디서든 자기 색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어떤 나무도 같은 색은 없다. 같은 은행나무라도 어느 나무는 더 노랗고 어느 나무는 아직 위쪽만 노랗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이웃이 누군지에 따라서 같은 종이라도 모두 다른 색이다. 모두가 하얗게 덮여버리기 전, 가을은 이렇게 모두 자기 자신이 되는 계절일까.

앞 마당이다.



그러고 보니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도 어느 하나 똑같은 모양도 색깔도 아니다. 색이 진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벌레 먹은 부분도 다르고, 점박이가 생긴 위치도 다르다. 한 나무에서 한 뿌리를 두고 자란 나뭇잎인데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보면 모두 다르다. 원래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 초록색 나뭇잎일 때는 높은 나뭇가지에 붙어있어 눈이 닿지 않아서 몰랐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떨어지는 그 순간 낙엽들은 모두 기를 쓰고 남과 다른 나를 드러내고, 그렇게 낙엽은 모두 힘껏 자기 자신이 된다.

예쁜데, 다 쓸어야 한다.
봄에 깐 시멘트 바닥마저 왠지 멋있다.


아, 그래.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인가 보다. 하늘은 파랑을 더 파랗게, 나무도 낙엽도 모두 있는 힘껏 자기 색을 진하게 드러내어 내가 남과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세상에 나와 똑같은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 나무들과 낙엽들 사이를 걸음걸음 걸어 다니며 이 멋진 풍경 속을 거닐게 해 준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다. 거기에 더해 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더 진하게 말해야 할지, 나는 어떻게 힘껏 나 자신이 되어야 할지를 조금은 쓸쓸해진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은 쓸쓸함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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