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힘껏 자기 자신이 되기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by 지우개연필

아침에 카톡이 왔다. 어디 어디에 마른 고추를 가져다 놓았다고. 내가 전에 고추기름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나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내가 생각나서 한 움큼 가져다 놓았단다. 직접 기르고 말린 태양초 고추 한 봉지. 덕분에 나도 오늘 고추기름 만들 수 있겠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태양초 고추를 집 안으로 들여놓고 나는 다시 나왔다. 마당에 나가 가만히 새 소리를 듣다가, 낙엽이 내리는 어쩐지 짠한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햇살이 마지막 한톨의 대추를 익히려 부지런히 떠오르는 발걸음 소리도 듣고, 람쥐람쥐 다람쥐가 나무 밑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새들의 수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도 바라보았다. 이 새소리로 말할 것 같으면, 꼭 이 시간쯤 그러니까 해가 떠올라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기둥 중간쯤까지 비추고 있는 이 시간쯤이 절정이다. 마치 나무에 핀 조명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이 때가 되면 참새니 까치니 이름도 모를 산새까지 죄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밤나무와 은행나무, 느티나무에 모여든다. 소리로 가늠해보건대 족히 백 마리는 넘겠다. 핀 조명 들어왔다고 다들 한 곡씩 뽑아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그리 격렬하게 토론을 하는지, 그도 아니면 어제 밤 드라마 얘기라도 하는 것인지 수다가 정말 엄청나다. 한 목소리를 내어 같은 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시끄럽지 않다. 소리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작은 파동들이 나뭇가지 곳곳에 걸려 있는 것들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 파동이 겹치고 흔들려 생기는 멋진 무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하긴 이것도 자연의 배려겠다. 소리가 보인다면 너무 작고 연약한 새들이 어디 있는지 잘 들킬까 봐 걱정한 따뜻한 배려. 모든 약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숨겨주기 위한.

작은 파동은 커녕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가면 새들마저 다 날아가 자취도 없다.



관심을 귀에서 눈으로 옮겨 한 바퀴 빙 둘러보면 눈 가는 곳마다 호강이다. 제 각기 다른 초록이었기는 해도 모두 초록이었던 나뭇잎들이 노랑과 빨강으로 나누어지고 그 노랑 안에서도, 그 빨강 안에서도 또 나누어지는 색깔파티. 거기에 파란색 하늘이 배경이 되어주니 어디서든 자기 색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어떤 나무도 같은 색은 없다. 같은 은행나무라도 어느 나무는 더 노랗고 어느 나무는 아직 위쪽만 노랗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이웃이 누군지에 따라서 같은 종이라도 모두 다른 색이다. 모두가 하얗게 덮여버리기 전, 가을은 이렇게 모두 자기 자신이 되는 계절일까.

앞 마당이다.



그러고 보니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도 어느 하나 똑같은 모양도 색깔도 아니다. 색이 진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벌레 먹은 부분도 다르고, 점박이가 생긴 위치도 다르다. 한 나무에서 한 뿌리를 두고 자란 나뭇잎인데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보면 모두 다르다. 원래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 초록색 나뭇잎일 때는 높은 나뭇가지에 붙어있어 눈이 닿지 않아서 몰랐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떨어지는 그 순간 낙엽들은 모두 기를 쓰고 남과 다른 나를 드러내고, 그렇게 낙엽은 모두 힘껏 자기 자신이 된다.

예쁜데, 다 쓸어야 한다.
봄에 깐 시멘트 바닥마저 왠지 멋있다.


아, 그래.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인가 보다. 하늘은 파랑을 더 파랗게, 나무도 낙엽도 모두 있는 힘껏 자기 색을 진하게 드러내어 내가 남과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세상에 나와 똑같은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 나무들과 낙엽들 사이를 걸음걸음 걸어 다니며 이 멋진 풍경 속을 거닐게 해 준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다. 거기에 더해 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더 진하게 말해야 할지, 나는 어떻게 힘껏 나 자신이 되어야 할지를 조금은 쓸쓸해진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은 쓸쓸함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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