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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Jul 25. 2015

떠밀리다

'떠밀다'(힘껏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다)의 피동사

비가 연신 내린다고 했다. 

일흔이 넘은 윤씨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이제야 장마다운 장마가 지려는가 보다고 하셨다. 관심 없다는 듯이 '그렇다더라' 하셨지만 눈빛은 이미 소풍 날짜 받아놓은 8살 겨우 먹은 어린애의 눈빛이었다. 농부들은 자주 그런 눈빛이 되곤 했다. 내 마음이 바빠지는 것은 배추 때문이었다. 이 비를 다 맞고 나면 배추는 못 먹을 정도로 썩을 거라며 그날도 지나가는 아주머니마다 한 마디씩 하셨다. 나는 비가 오기 전에 저 배추를, 저 시퍼런 배추를, 저 시퍼렇고 한번도 다뤄보지 않은 미지의 배추를 처리해야 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월요일 아침, 부랴부랴 부엌칼을 하나 들고 나가 열 포기의 배추를 수확했다. 


이제 이 배추를 어쩔 것인가. 

김치를 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3년 차 주부인 나에게 김치는 아직 미지의 세계였을 뿐 아니라 이 정도 내공으로는 감히 넘봐서는 안될 고수들의 세계로만 여겨졌다. 김치는 엄마가 담그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아줌마인 나는 있지만 아직 엄마는 없다. 그래서 처음 배추 모종을 내 손으로 심던 2015년 5월 9일에도 나는 이 배추가 김치가 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을 끓여먹거나 샐러드를 해 먹기에는 열 포기나 되는 배추의 이파리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리 말고 배추로 할 수 있는 다른 먹을거리가 무엇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머릿속에는 이미 김치에 대한, 미지의 세계이며 고수들의 세계로만 여겨지던 그 김치에 대한 동경과 도전의식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 인터넷을 한참 뒤져 백김치 레시피를 서른 개쯤 읽고 나니  한두 번쯤은 백김치를 담가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배추를 절이며 소금 젖은 손으로 '배추 절이는 법'을 검색했고 밀가루 풀을 쑤면서, 파프리카를 썰고 나서, 무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도 계속 무언가를 검색했다. 내가 김치를 담근 것인지 김치가 나를 담근 것인지 헷갈릴 만큼. 



그렇게 백김치가 완성되었다. 

첫 시도 치고는 모양도 냄새도 그럴듯한 김치였다. 맛은 장담할 수 없으니 비주얼에 초점을 맞추자는 전략이 잘 먹혀들어갔고 백김치가 김치 중에 가장 쉽다는 조언을 들은 것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양념만 많이 들어가면 양잿물도 맛있다더니 그 말은 진리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주부'에서 '김치를 담글 줄 아는 주부'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한 단계 이상의 성장이라며 새콤하게 익어가는 백김치 향기- 그래, 이건 향기다 - 를 맡을 때마다 나는 마음껏 뿌듯해하고 있다.


내가 김치 담그기를 시도한 것은 '열 포기의 배추를 썩게 버려둘 수 없어서'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밭에서 배추가 눈 동그랗게 뜨고 죽어가게 할 수 없었고, 수확한 배추가 시퍼렇게 살아 버둥거리는데 버려두고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기 일주일 아니, 하루 전까지도 나는 김치를 담글 계획이 전혀 없었다. 순전히 배추에 등 떠밀려서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계획이나 용기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배추가 내 인생에 훅 들어와 내 등을 떠밀었다. 힘껏 힘을 주어 김치로 나아가게 했다.


완성된 백김치를 김치통에 넣으면서, 사실은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있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주도적이고 도전정신 넘치는 인간인 척 해 왔지만 실상은 등 떠밀려 시도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도전할 것인지, 끝내 거부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버틸 것인지의 차이는 있었지만 많은 순간, 정말 많은 일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 주어지곤 했다. 


그리고 오늘 잘 익어 새콤한 맛을 자랑하는 백김치를 석석 썰어 접시에 옮겨 담으면서, 등  떠밀려하게 된 수 많은 일들이 모두  재미없거나 전부 잘못된 일이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니 예정에 없던 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해 보지 않은 일도 까짓 거 시도해보는 대범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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